구 소련권 시민혁명 다음은 어딘가?-동아일보 펌
구 소련권 시민혁명 다음은 어딘가?-동아일보 펌
  • 이진희
  • jinhlee@hk.co.kr
  • 승인 2005.03.08 0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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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차례는 어디일까?”

요즘 옛 소련권 국가에서 선거가 있을 때마다 서방 언론이 단골로 던지는 질문이다. 실제 모스크바 외교가에선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에 이어 다음엔 어느 나라에서 시민들에 의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날지가 최대 관심사다.

영국의 더타임스는 각국의 상징물을 앞세워 장미(그루지야)와 오렌지(우크라이나) 혁명에 이어 포도(몰도바)와 레몬(키르기스스탄) 혁명 등이 예고된 상태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지난달 27일 키르기스스탄 총선과 6일 실시된 몰도바 총선이 전에 없는 관심을 모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일단 몰도바에선 친 서방 정책의 공산당이 과반수 득표에 실패, 연정을 해야 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런가 하면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로루시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서는 오렌지 귤 바나나 등 어떤 혁명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외부의 관심이 이 나라들에 실체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일 것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다짐한 ‘자유의 확산’은 이처럼 옛 소련 지역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민주화 수준이 낮고 일부에서 철권통치와 장기집권이 계속되고 있는 나라일수록 더욱 그렇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최근 외교전문지 ‘세계 현안과 러시아’에 기고한 글에서 “민주주의는 외부에 의해 강요돼선 안 되며 체제를 힘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그 지역 정세만 불안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민주화 확산 노력에 대해 오랫동안 부정적인 시각이었다. ‘민주화’를 내세워 러시아 내정에 개입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또 미국이 이들 국가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끌어들여 러시아를 포위하려 한다는 의심도 거두지 않고 있다.

실제 미국은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의 정권교체를 적극 지원했다. 민주화혁명을 통해 탄생한 새 지도자들은 공교롭게도 강한 친미 성향을 갖고 있다.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장학금을 받으며 컬럼비아대에서 공부했다.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부인이 미국인 출신이다. 부인 카테리나 여사는 결혼 전 미 국무부에서 근무했던 전력 때문에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서 정략적으로 유셴코 대통령에게 접근해 결혼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두 나라는 물론이고 정권교체 가능성이 제기되는 국가들도 지정학적으로 미국에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갖고 있다. 앞으로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 역시 계속될 전망이다. 몰도바 총선을 앞두고 리처드 루거(공화당) 미 상원의원이 몰도바 주둔 러시아군의 철수 요구 결의안을 추진한 것이 좋은 예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요즘 러시아에선 미국의 민주화 지원을 현지에서의 ‘러시아 쫓아내기’와 ‘미국 세력 확대’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상대국 국민을 움직이지 못하는 힘의 사용이 성공할 수 있을까. “외부 세계는 특정 국가에서 민주화 여건이 조성되도록 지원하는 데에 그쳐야 하고 그 나라의 전통과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라브로프 장관의 지적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김기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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