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만에 '해프닝'으로 끝난 탐사기자 체포사건, 그 책임은 누가 질까?
5일만에 '해프닝'으로 끝난 탐사기자 체포사건, 그 책임은 누가 질까?
  • 이진희 기자
  • jhnews@naver.com
  • 승인 2019.06.13 0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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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매체 '메두자'의 이반 골루노프 기자, 마약혐의로 체포된지 5일만에 석방
유력신문, 언론인, 시민들 '비리 유착의 입막음용으로 체포' 조직적 항의에 항복?

마약 거래 시도 혐의로 체포됐던 러시아의 유명 탐사보도 전문 기자 이반 골루노프가 11일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체포 5일만에 사실상 '해프닝'(?)으로 끝난 것 같다. 골로노프 기자는 이날 경찰서에 출두해 간단한 조사를 받은 뒤 전자발찌를 벗고 석방됐다.

온라인매체 '메두자'

하지만 반정부 온라인 매체 '메두자'의 골루노프 기자 체포에 대한 후유증은 예상외로 컸다. 그가 풀려났음에도, 이튿날인 12일 모스크바에서는 골루노프 기자를 지지하고, 그에게 가짜 혐의를 씌워 사건을 조작하려 한 경찰 책임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 주요 방송 NTV의 뉴스 진행자도 "마약사건이 조작됐다면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 푸틴'을 대표하는 방송인 드미트리 키셀료프도 이례적으로 TV채널 '로시야1'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해 “경찰이 일 처리를 서툴게 했으며 골루노프 기자에 대한 구타가 있었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콜로콜체프 내무장관은 11일 "골루노프의 마약 관련 혐의를 입증할 수 없어 그에 대한 수사를 종료하기로 결정했다"며 "경찰의 체포가 적법한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내무부 자체 감찰팀의 조사 결과를 상급 기관인 연방수사위원회에 보냈다"고 밝혔다. 또 해당 지역 경찰서장과 마약 분야 책임자의 직위 해제를 대통령에게 건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 형법 300조·305조에 따르면 사법권 등 공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특정 사안을 부적절하게 결정, 혹은 조사한 경우 6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12일은 러시아가 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독립기념일' 휴일이었다. 골루노프 기자를 지지하는 젊은이들은 모스크바 시당국의 시위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북쪽 '치스티예 프루디' 지하철 역사 주변에 모여 모스크바시 경찰청 앞으로 향하는 가두 시위를 벌였다. 참여자는 1,200여명에 이르렀다. 경찰은 해산 요구에 응하지 않은 시위 참가자 400명을 연행했다가 대부분 풀어준 것으로 전해졌다. 

골루노프 기자는 지난 6일 모스크바 시내 거리에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는 과정에서 마약 물질 4g이 발견됐다는 이유로 전격 체포됐다. 그는 2명의 사복 경찰에 의해 수갑이 채워져 경찰서로 이송됐으며 구두를 벗고 속옷과 바지를 무릎까지 내릴 것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이후 경찰은 골루노프의 자택을 압수수색해 5g의 코카인과 저울 등이 발견됐다며 법원에 구속 영장을 신청해 2개월간 자택 구금 결정을 받아냈다. 그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될 경우 10~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골루노프 기자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면서, 장례사업에 관한 탐사 보도 등 자신의 비리 폭로성 취재 활동 때문에 부당하게 체포됐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비리 업체와 경찰의 유착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라는 의혹으로 확산되면서 온라인 SNS를 통해 급속도로 번졌다. 

그의 변호인은 누군가 골루노프를 마약 혐의로 얽어 넣기 위해 그의 배낭과 집에 몰래 마약을 집어넣었다는 주장을 폈다. 실제로 그의 소변검사에서 마약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마약 관련 혐의는 러시아에서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릴 때 자주 쓰는 수법이다.

게다가 경찰이 골루노프의 아파트에 있는 비밀 마약제조실 사진이라며 내무부 사이트에 올린 9장의 사진 가운데 1장 만이 실제 그의 아파트에서 촬영된 것이고, 다른 사진들은 마약 거래범들의 활동을 찍은 가짜 사진임이 드러나면서 경찰의 사건 조작 의혹이 커졌다. 

분노한 골루노프 지지자들은 그를 체포한 경찰서와 가택연금 판결을 내린 법원에까지 몰려가 1인 피켓 시위를 벌였고, 코메르산트, 베도모스티, RBC 등 러시아 유력 일간지들은 1면에 ‘나/우리는 이반 골루노프다’라는 큰 제목을 단 신문을 10일 발간하기도 했다. 이들은 또 공동성명에서 "골루노프가 취재 활동 때문에 체포됐다"면서 "체포 과정에 대한 투명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인 피켓시위/러시아 언론 캡처
1인 피켓시위/러시아 언론 캡처

그가 소속된 메두자의 이반 콜파코프 편집인은 "골루노프가 기사와 관련해 협박을 받았으며 경찰 조사 과정에서 구타당했다"고 폭로했다. 현지 언론들은 연일 '소변 검사에서 마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체포 후 12시간까지 변호사 접견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골루노프가 뇌진탕과 갈비뼈 골절을 당했다' 는 등 그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다. 

파문이 커지자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이 사건에 대해 보고 받고 크렘린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경찰이) 실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내놨다. 

앞뒤 정황으로 볼때 경찰은 골루노프 체포의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자체 조사를 통해 내부 잘못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종결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미 워싱턴포스트가 “푸틴 대통령 체제하에서 반정부 언론인을 이렇게 풀어주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보도한 대목은 음미해볼 만하다. 그동안 러시아 언론이 정부에 집단 반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협박에 시달리다가 살해당한 언론인도 많았다. 미국의 비정부기구 언론인보호위원회(CPJ)에 따르면 1992년 이후 러시아에서 기자 58명이 살해됐다. 국제 언론감시 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 프리덤하우스는 지난해 러시아 언론 자유도에 0점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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