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시베리아횡단열차 - '혹시나'가 '역시나'로 끝난 첫째날
뉴- 시베리아횡단열차 - '혹시나'가 '역시나'로 끝난 첫째날
  • 이진희 기자
  • jhnews@naver.com
  • 승인 2020.02.11 02: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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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에서 기대를 잔뜩 안고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짐은 서울에서 출발할 때보다 더 늘었다. 현지에서 산 즉석라면 '도시락'과 보드카, 빵, 오이지가 든 병, 치즈. 김치 등이 든 배낭 하나와 5리터 짜리 물병이다. 서울에서 갖고온 식료품까지 합하면 바로 전쟁터로 나가도 될 것 같다.

블라디보스톡 역사안에 설치된 전광판에 모스크바 행 001 열차가 1번 플랫폼에서 출발한다고 써 있다.
열차를 기다리는 블라디보스톡 역

준비도 완벽하니, 이제는 과거와는 달리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뉴-시베리아횡단열차 여행에 대한 기대는 열차 출발 30분 전, 플랫폼으로 나가는 문이 열리면서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열차 외양이 작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 '한달살기' 시절에 수없이 봐왔던 열차와 다를 바 없다. 값비싼 '프리미엄 열차'라면 외양부터 다를 것이라는 예상은 어그러졌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출발점을 알리는 상징물 앞에서 셀카를 즐긴 뒤 오른 기차안. 역시 기대와는 달랐다.

시베리아횡단열차 동쪽 출발점을 알리는 상징물과 기관차.
여권과 티켓을 제시하고 모스크바행 001 열차에 탑승하는 승객들.

까다로운 신분확인을 거쳐 열차에 오르니, 큰 사모바르(물주전자) 밑에서 뜨거운 불기운이 느껴졌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블로그 사진'으로 본 현대식 정수기 대신 사모바르 그대로였다.
 

열차안에 설치된 사모바르. 뜨거운 물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

갑자기 "진짜 우리 열차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잠깐. 더 큰 문제가 우리를 기다렸다. 어두운 공간을 더듬어 예약한 2등석 '꾸뻬'(2층 침대 4인실)를 찾아갔는데, 러시아인 한 명이 '아래 침대'가 자기 좌석이라고 했다. 

이게 뭔일? 진짜 우리 열차가 아닌가? 그럴 리가 없다. 열차를 관리하는 소위 차장(열차 승무원)이 여권과 티켓을 꼼꼼하게 확인한 뒤 태워줬지 않는가? 그렇다면 혹시 내가 꾸뻬 좌석 예약을 잘못했다?
 

2층침대가 있는 꾸뻬 내부. 1층은 푸른색 가죽의 쇼파형태다. 밤에는 침대로 변하는 요술램프?

우려는 그대로 현실이었다. 인터넷 티켓 예약을 하면서 다른 꾸뻬의 아래 침대 2개를 예약한 것. 이상하게도 한 꾸뻬의 아래 침대(좌석) 2개만 예약하는 게 잘 되지 않아 하나씩 2번에 걸쳐 예약했는데, 그때 무슨 착오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미 엎지러진 물. 대책을 빨리 찾는 게 살 길이었다.

그 사람과 좌석을 바꾸려고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니, '이르쿠츠크'란다. 우리 목적지 '울란우데'보다 더 먼 곳이다. 그 사람이 우리와 자리를 바꾸면, 우리가 내린 다음에 또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번거로움이 불가피하다.

열차 꾸뻬입구. 사모바르와 판매하는 물품들이 왼쪽에 보인다

결국 문제 해결의 키는 차장이 갖고 있다. 이제 막 열차가 떠난 직후여서 차장은 이 사람 저 사람 질문에 답하고 챙겨주고, 스스로 해야 할 일도 많아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그렇다고 마냥 눈치만 볼 수는 없는 일. 틈을 봐 "좌석 예약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고, "자리를 바꿔줬으면 좋겠다"고 사정을 털어놓았다. 차장은 "나중에"라는 간단한 멘트만 남기고 돌아서 갔다.

급한 것은 우리였다. 짐 정리를 빨리 해야 편안하게 여행을 즐길텐데, 자리가 정해지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무작정 이쪽 꾸뻬의 아래 침대 2개를 우리가 쓰겠다고 했더니, 차장은 뭔가 열심히 체크해 보더니 "안된다"고 했다.

"하바로프스크를 지나서 보자"고 했다. 하바로프스크는 내일 아침에야 도착한다. 그럼 오늘 밤은? "하바로프스크까지 지금은 괜찮은데, 아직도 누가 티켓을 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 바꾸지 말라는 이야기다.

꾸뻬 아래 침대. 들어가면 좌석을 비스듬하게 세워놓는다. 아래로 눌러 쇼파로 쓰고, 밤에는 침대로 바꾼다

아직은 자리가 비어 있으니 우리의 이번 여행 운을 믿고, 밤새 아무도 그 자리를 예약하지 않으리라고 기대하고 그 꾸뻬에서 둘이 함께 지내기로 했다. '미리 준비한 선물이나 하나 줄까?' 생각하다가 하바로프스크를 지난 뒤 정식으로 자리를 바꿔주면 그 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식당칸. 디자인이 깨끗한지, 모던한지, 그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열차 식당 칸에서 맥주를 시켜 불안한 마음을 달랜 뒤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여전했다. 중간 중간 잠이 깰 때면 시간을 확인하며 하바로프스크까지 아무 일이 없기를 기도했다. 

이번에도 기대는 또 어그러졌다. 몇시인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장의 화난 표정과 말투. 아이구! 잘못됐구나! 

그 뒤론 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중간에 탄 승객을 어느 꾸뻬로 데려갔는지 모르지만, 선물을 하나 챙겨 차장실로 갔다. 야식을 먹고 있는 그에게 "진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선물을 내밀었다. 못 이기는 척 받는 그를 보고 얼른 몸을 돌렸다. 더 얼굴을 마주치기가 영 미안하고 민망했다. 

그리고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기 전, 여자 승무원이 일을 시작했다. 뚱뚱한 아줌마다. 기회를 보다가 선물을 먼저 내밀면서 사정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이미 남자 차장에게서 전달을 받은 모양이었다. "알겠다"고 했다. 약발이 먹히겠지, 막연히 생각만 했다.

다음날 새벽에 도착한 하바로프스크. 역사엔 하바로프스크라고 크게 쓰여있다.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했다. 차창을 내다보니, 바깥에는 많은 사람이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많이 타네, 역시 큰 도시는 큰도시이구나" 감탄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우리가 바꾼 좌석에 가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분이 '꾸뻬' 앞에서 17번 좌석을 찾았다. 바로 우리 좌석이다. 여승무원이 자리를 바꿔줬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자리를 안내하면서 사정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안다.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선물 준비를 많이 한 게 진짜 다행스러웠다. 그 분에게도 선물을 안기며 "진짜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어렵게 자리 문제가 해결되니, 갑자기 열차안 모든 게 다 좋아보이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프리미엄 열차야? 정수기도 없고, 전자렌지도 안보이고, 화장실도 달라진 게 없는데.."라던 불만도 사그라든다. 
 

열차 화장실, 블로그에서 본 것과는 달리, 옛것 그대로다.

한번 마음을 달리 먹으니, 좌석 위에 있던 1회용 치솔과 치약, 실내화 묶음도 새롭게 보이고, 물 한병과 쿠키 하나, 물티슈 등이 든 작은 박스 서비스도 '달라진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객차엔 샤워시설도 있단다. 또 전자렌지는 승무원 실에 배치되어 있어, 필요하면 승무원에게 부탁하면 된다. 승무원실에는 작은 정수기도 있었다. 그만하면 달라진 열차인가?

 

서비스로 제공된 물과 쿠키, 1회용 숟가락 포크 물티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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