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 30년 한 풀었다 - 나고르노-카라바흐 평화협정을 분석해보니
아제르바이잔 30년 한 풀었다 - 나고르노-카라바흐 평화협정을 분석해보니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0.11.10 1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력 열세의 아르메니아, 항복선언 - 과거 점령지역 + 상당 지역 통제권 이양
푸틴 대통령 '영리한' 협상 중재 - 양국의 치명적 약점 파고든 '서명작전' 성공

전쟁은 승기를 잡은 쪽이 "이 정도면 됐다"고 여길 때 끝나는 법이다. 카프카스의 '화약고'인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이번 교전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종교적 '앙숙 국가'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이 지역의 통제권을 놓고 지난 9월 말부터 맞붙은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평화협정을 중재한 러시아도 튀르크계 연합(아제르바이잔-터키)의 압도적 군사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크렘린, 푸틴 대통령, 알리예프 아제르 대통령, 파쉬냔 아르메니아 총리 등 3국 정상 공동성명 공개/얀덱스 캡처
나고르노-카라바흐 평화협정 체결을 발표하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니콜 파쉬냔 아르메니아 총리,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9일 밤늦게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지역에서 교전과 모든 군사활동을 중단하는 공동성명(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양측은 모스크바 시간으로 10일 오전 0시부터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하기로 했다. 

이 협정은 그러나 그 내용상으로 아르메니아의 '항복 선언'에 가깝다. 9개 항목의 합의 내용이 공개되자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주민 수천 명이 반대 시위에 나선 이유다.

시위대는 "우리 영토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외치며, 일부는 정부 청사와 의회 건물에 난입해 집기를 부수는 등 격한 분노를 표출했다. 이 과정에서 아라라트 미르조얀 의회 의장이 시위대에 폭행을 당해 심하게 부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르조얀 의장도 합의 내용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메니아 시위대의 의회 난입/러시아 언론 동영상 캡처

또 다른 시위대는 협상 책임이 있는 파쉬냔 총리 관저로 몰려가 출입문과 창문, 가구 등을 부수며 난동을 부렸다. 당시 총리는 관저에 없었다고 한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출신인 파쉬냔 총리는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항복해야 하는) 괴로운 심정을 피력했다. 그는 "우리 국민과 내 개인적으로도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라며 "군 전력에 대한 전문가들의 정확한 평가를 토대로 이 같은 결정을 내렸으며, 현 상황에서 가능한 최상의 해결책"이라고 해명했다.

실제로 아르메니아는 이번 협정으로 1992~94년 전쟁으로 얻어낸 전과를 포기하는 것을 물론이고, 사실상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통제권을 상당히 잃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언론은 "아르메니아가 1994년 휴전협정으로 점령한 땅을 넘겨주고, (나고르노-카라바흐) 문화 중심지인 슈시 등 영토 일부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평가했다.

협정에 따르면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켈바자르 지역을 오는 15일 아제르바이잔에게 넘겨주는 것을 시작으로, 1994년 평화협정으로 점령한 아제르바이잔의 가자흐는 물론, 인근 아그담 지역도 오는 20일까지 반환하기로 했다. 또 아르메니아 본토와 연결되는 라친 지역마저 내달 1일까지 넘겨줘야 한다.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교전 장면/출처:양국 국방부

아제르바이잔은 내달 1일을 기점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수도격인 스테파나케르트를 제외한 주요 지역 상당 부분을 장악하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또 국제사회가 인정한 국경선으로 보면 아제르바이잔은 지난 30년 가까이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하고, 아르메니아는 빈손으로 철군하는 격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수도 격인 스테파나케르트는 5㎞ 넓이의 '라친 회랑'을 통해서만 아르메니아 본토와 연결된다. '라친 회랑'은 러시아 평화유지군에 의해 안전이 보장된다.

러시아는 소화기로 무장한 병력 1천960명과 장갑수송차 90대, 군용차량 및 특수장비 380대 등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을 향후 5년간 분쟁 지역에 배치해 군사충돌 방지와 인적 물적 통행및 교류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했다. 

푸틴 대통령은 분쟁 양국이 처한 현실과 타이밍을 적절히 공략한 끝에 이번 평화협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이달들어 양국 정상과 잇따라 전화회담을 가졌는데, 아제르바이잔이 8일 실수로 아르메니아 주둔 러시아군 전투 헬기를 격추시킨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헬기 격추사건으로 러시아군 조종사 2명이 사망했고,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과해야 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압박을 가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아르메니아는 문화중심지이자 전략요충지인 슈시가 아제르바이잔 측에 넘어가자 더 이상 군사적으로 버틸 수 없다는 전력 열세를 절감하고 있는 상태였다. 

합의안의 골격도 푸틴 대통령의 구상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발다이 클럽' 투자 포럼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정권(친아르메니아 분리주의 공화국)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아르메니아가 7개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측에 넘겨주는 방안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발다이 클럽' 투자 포럼 화상회의 장면/사진출처:크렘린.ru

당시 그는 넘겨줄 7개 지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협정에 포함된 지역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그는 러시아의 모든 정보 자산을 취합한 결과, 양측의 교전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방적인 우세로 진행되고, 끝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메니아측의 상당한 양보만이 '완전 파국'을 막는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르메니아는 그동안 수차례 크렘린에 SOS를 친 바 있다. 

러시아는 평화협정 합의 후 곧바로 평화유지군 병력과 군 장비를 실은 일류신(IL)-76 수송기를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으로 띄웠다. 평화유지군 병력은 러시아의 제31공수여단으로 구성됐다. 이 공수부대는 지난 2008년 카프카스 지역 남오세티아 분쟁(대 그루지야 전쟁)과 제 2차 체첸 전쟁에 참전한 부대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옛 소련 시절,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다수인 아제르바이잔 영토였다. 그러다보니, 양측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1991년 소련 붕괴 후 민족·종교적 감정이 폭발했다. 양국간의 1992∼94년 전쟁은 아르메니아의 승리로 끝났고, 아제르바이잔은 '영토 수복'을 꿈꾸며 지금까지 국방력을 강화해 왔다. 그 결과, 아제르바이잔이 이번 전쟁에서 상대를 압도했고, 사실상 항복을 받아내는 평화협정 체결에 성공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