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을 앞둔 고르바초프, 다큐멘터리를 찍다 - 외롭고 쓸쓸한 노년 모습 조명
구순을 앞둔 고르바초프, 다큐멘터리를 찍다 - 외롭고 쓸쓸한 노년 모습 조명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0.12.13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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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다큐 '태양 아래'의 감독 비탈리 만스키의 두번째 '고르바초프 다큐'
'삶의 마지막' 준비하는 20세기 역사의 인물, 뒷 이야기를 털어놓았을까?

소련 공산당의 마지막 최고권력자(서기장)이면서, 유일무이한 소련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노년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고르바초프, 파라다이스' Горбачев. Рай가 제작됐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올라 20세기 역사를 무수히 바꿨지만, 1991년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게 쫓겨나듯 크렘린 집무실을 비워준 고르바초프는 내년 3월 구순(90세) 생일을 맞는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신종 코로나(COVID 19)로 자택에서 '자가 격리'에 버금가는 은둔 생활 중이다. 독일에 거주하는 그의 외동딸과 손자도 '구순 생일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신종 코로나로 항공편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여느 보통사람과 다름없이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만스키 감독,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말년을 담은 다큐 촬영/얀덱스 캡처손
고르바초프 손자의 방문도 끊어졌다/얀덱스 캡처

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은 러시아 다큐멘터리 영화의 거장 비탈리 만스키. 김기덕 감독이 발해 3국중 하나인 라트비아에서 신종 코로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알린 사람이다. 리가(라트비아의 수도명) 다큐멘터리 영화제(ArtDocFest/Riga)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만스키 감독은 권력에 굴하지 않는 도발적인(?) 작품 제작으로 유명하다. 1년간에 걸쳐 찍은 다큐멘터리 '태양 아래'로 북한의 숨겨진 실상을 폭로했던 그다. 촬영 전후 북한 당국이 다큐 제작에 개입하는 과정을 '몰카'에 담아 세상에 알렸다.

또 '푸틴의 증인들' Свидетели Путина 이란 다큐를 만들어 지난 2018년 12월 시사회를 갖기도 했다. 옐친 전대통령의 전격 사퇴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은 푸틴이 2000년 대선을 거쳐 대통령 직에 오른 뒤 첫 임기 4년 동안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을 담은 작품이다. 

이번 다큐 '고르바초프, 파라다이스'는 만스키 감독가 고르바초프에 대해 다룬 두번째 작품이다. 그는 20년 전 '고르바초프, (소련)제국 이후' Горбачев. После Империи를 만든 바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고르바초프, 파라다이스'는 지난 10월 3일 첫 시사회가 열렸다. 이 다큐에는 만스키 감독 특유의 도전적인 카메라 워킹이 사라지고 '고르바초프의 격리된 생활을 증언하듯' 조용한 삶을 담고 있다는 평이다.

시사회에 참여한 현지 평론가 세르게이 시체프는 "만스키 감독의 새 다큐는 도발적인 과거 작품과 달리 1시간 30분간에 걸친 고르바초프와의 평안한 인터뷰"라며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시청자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다"고 전했다.

다큐 필름 '고르바초프, 낙원'의 장면들/사진출처: artdocfest.com

이 다큐의 주 배경은 '고르바초프 펀드'가 소유한 모스크바 교외의 거주지다. 카메라는 사람(고르바초프)를 주로 잡지 않는다. 그의 말은 흘러나오고 있지만, 화면에서는 고르바초프 거처의 일상이 느릿느릿 흘러간다. 발 앞에 고양이가 엎드려 있고, 문이 열린 부엌에서는 만두와 감자 요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또 흔들리는 커튼 옆 벽에 걸린 라이사(고르바초프 아내)의 초상화와 그녀를 담은 사진들이 정물화처럼 담겨 있다. 그 아래 탁자에는 소련 시대 최고의 케이크인 '쁘티치예 말라꼬' Птичье молоко (새의 우유라는 뜻)이 놓여 있다. 고르바초프는 그 공간을 보행보조기구에 몸을 의지한 채 천천히 걸어다닌다. 

한 매체는 "구순의 고르바초프가 천천히 집안을 돌아다니고 이웃을 방문하는 등 일상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하는 작품"이라며 "고르바초프는 만스키 감독과의 대화에서도 예민한 질문을 웃으며 피하고, 주제를 슬쩍 바꾸는 노련함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래서 혹시 소련의 전 최고권력자 머리 속에 든 수많은 역사적 비사가 공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접어야 한다고 했다.

만스키 감독 스스로도 시사회 시작 전에 "무슨 거창한 정치적인 폭로를 기대하지 말고 고르바초프와 1시간 반을 보내라"고 부탁했다.

고르바초프의 사임 발표(위)와 20년전 다큐에 나온 고르바초프 모습/유튜브 캡처

다큐는 20세기 역사를 바꾼 베를린 장벽의 붕괴나, 소련 공산당 강경파의 쿠데타, 소련의 붕괴, 발트3국의 독립,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티(개혁 개방정책) 등 역사적인 장면을 담지는 않았다. 만스키 감독이 고르바초프에게 "왜 사임했느냐?"고 묻고, 소련 해체를 가속화한 민주화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지만, 결정적인 한방은 없다.

고르바초프는 질문에 천천히 대답하거나, 침묵에 빠지고, 잘 고른 단어로 다음 질문을 차단하고, 또 외면한다. 평론가 시체프는 "고르바초프는 그가 실행하거나 알고 있는 역사적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며 "역사의 시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조용한 집에서 시계가 똑딱 거리는 소리로만 측정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와 가까운 스타브로폴 출신인 고르바초프는 다큐 속에서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로 농담하고 노래하며, 푸쉬킨과 예세닌의 시를 읽는다. 역사를 바꾼 정치인 고르바초프가 아니라 바로 이웃의 한 노인을 카메라에 담았다는 평을 듣는 이유다.

20년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 라이사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도 담겼다. 그는 라이사 없는 20년은 "지옥에서 보낸 것과 같다"고 했다.

이 영화가 일반인들에게 언제 개봉될 지는 확실하지 않다. 원래 내년 4월 개봉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로 불투명해졌다. 고르바초프도 아직 이 다큐를 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큐는 신종 코로나의 대유행 이전에 촬영됐다.

고르바초프는 개인 비서와 단 둘이 지내고 있다. 다큐를 찍을 때도 그의 가족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비서는 현지 언론에 "내년 3월 구순잔치에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온라인을 통해 축하인사를 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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