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뒤집기) 디폴트이면서 디폴트가 아닌, 100년여만의 러시아 디폴트,
(러시아 뒤집기) 디폴트이면서 디폴트가 아닌, 100년여만의 러시아 디폴트,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2.06.28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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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 이후 100여년 만에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맞선 미국·유럽의 대러 제재로 어느 순간부터 예상됐던 일이다. 미국 재무부가 어떻게든 러시아를 디폴트로 밀어넣기 위해 가능한 모든 제재를 동원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로서는 아예 포기하고 '마이 웨이'를 선언한 상태였다.

블룸버그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26일까지 외화 표시 국채(유로본드) 2건의 이자 약 1억 달러(약 1천300억원)를 소유자(투자자)들에게 지급하지 못했다. 만기일은 원래 지난달 27일이었으나, 30일간의 지급 유예기간으로 인해 이날자로 디폴트가 성립됐다. 

블룸버그, 러시아가 1918년 이후 처음으로 27일 밤 디폴트에 빠졌다고 선언/얀덱스 캡처 

하지만, 현지 언론은 블룸버그 통신의 '디폴트 보도'를 전하면서 '인위적인 디폴트'라는 용어를 썼다. 크렘린과 러시아 재무부는 "이건 디폴트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27일 기자들에게 "이 상황을 디폴트라 부를 근거가 없다"며 "디폴트 관련한 주장은 완전히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러시아 재무부는 이날 "채권 발행 문서(계약 조항)에 따르면 채무자(러시아) 측의 자금 지급이 없을 때만 디폴트가 되는데, 이번에는 지난 5월 20일 지급이 이뤄졌다"며 "채권자(투자자)들이 자금을 수령하지 못한 것은, 미지급 때문이 아니라 발행 문서에 직접 규정되지 않은 제3자의 행동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외국 금융 중개기관들의 조치는 러시아 재무부의 통제 밖에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아는 한, 금융거래에서 부채보다 훨씬 많은 자산을 갖고 있는 기업이 만기로 돌아온 빚(어음)을 제때 못 갚을 경우, '흑자 부도가 났다'고 말한다. 현금(자산)이 묶여 있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유동성에 문제가 생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둘러 자산을 처분해 빚을 갚기도 하고, 여의치 못해 '회생'(법정관리)을 신청하더라도, 법원은 기업의 '존속 가치'(회생)가 '청산 가치'(파산 처리)보다 높다고 판단해 신청을 받아들인다.

이같은 금융 거래 상식을 러시아의 디폴트에 적용하면 이해 못할 대목이 많다. 전쟁 상태가 아닌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디폴트를 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외환보유고(자산)가 지난 5월 말 기준으로 5천900억 달러 정도다. 이 중의 절반 가량(약 3천억 달러)은 대러 제재조치로 예탁 서방측 금융기관들에 의해 동결됐다고 해도, 3천억 달러 정도는 가용 가능하고, 러시아는 매월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 수출로 수백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유로본드의 이자 1억달러는 사실 러시아에게는 '푼돈'에 불과하다.

유로본드/사진출처:moneyinvesto.com

그렇다면 왜 100여년 만에 디폴트라는 게 일어났을까? 한마디로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다. 전쟁 상황에서 적대국을 향해 무슨 짓을 못하겠느냐마는, 미국 등 서방 진영은 러시아가 빚을 갚고 싶어도, 갚지 못하도록 '은행 거래' 자체를 막았다. 쉽게 말해 부도가 난 게 아니라, (서방측이) 러시아를 부도가 나도록 소위 '금융 전쟁'을 벌인 것이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이 "(서방 측이) 러시아를 인위적으로 부도로 내몰았다"고 반발한 이유다.

'전쟁에 버금가는' 서방측의 금융 제재에 러시아는 어떻게든 투자자들에게 빌린 돈(과 이자)을 상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찾아온 것으로 평가된다. 러시아는 지난 3월 우크라이나 전쟁 후 처음으로 유로본드의 이자 지급일이 다가오자, 서방 측이 묶어 놓은 "내(러시아) 돈(계좌)을 동결에서 풀어달라"고 요구하다가 안되자, 수중에 갖고 있는 돈(외화)으로 이자를 지불했다. 지난 4월 투자자들에게 지급한 이자및 원금 6억 4,920만 달러가 그랬다.

러시아 재무부(위)와 미국 재무부/사진출처:위키피디아, 기관 홈페이지

하지만, 미국은 지난 달 말 그 루트마저 틀어막았다. "미지급됐다"는 1억달러도 사실은 러시아 재무부가 지난달 27일 국제예탁결제회사인 '유로클리어'에 이미 송금한 상태다. '유로클리어'가 그 돈을 러시아 유로본드 소유자들에게 나눠주면 문제가 생길 일이 없다. 그러나 '유로클리어'는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미국과 유럽의 제재조치 때문이다. 

그렇게 30일간의 유예기간이 지나갔다. 당연히(?) 러시아는 디폴트에 빠졌다.

이같은 상황을 미리 예측한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 판매로 얻은 막대한 자금이 있어 외채를 갚지 못할 상황이 아니다"고 투자자들을 설득하면서 '내 돈이 XX은행에 있으니 알아서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투자자들이 스스로 찾아갈 리가 만무하고, 찾아갈 수도 없다.

푸틴 대통령, 외채의 루블화 상환에 관한 대통령령에 서명/얀덱스 캡처

러시아의 다음 수순은 푸틴 대통령이 지난 22일 서명한, '외화 표시 국채의 원리금(이자) 상환을 루블화로 가능하도록 한 대통령령'의 마련이었다. 유로본드를 판매한 서방측 금융기관도, '유로클리어'와 같은 국제예탁결제회사도 투자자들에게 정상적으로 자금을 배분하지 못하니, 러시아 금융기관에 투자자들을 위한 '특별계좌'를 개설하고 이 계좌로 루블화로 이체해 놓겠다는 것이다.

실루아노프 재무장관은 "루블화로 이체하지만, 환율 변동 위험으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투자자들이 지불 완료 문서에 서명하면, 일단 루블로 이자를 수령한 뒤 바로 외화로 바꿔 제한 없이 인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믿고 따르는 투자자는 없었다.

실루아노프 장관은 이달 중순 상트페테르부르크국제경제포럼(SPIEF)에서 "말을 물가로 끌어올 수는 있지만, 말에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며 답답한 상황을 토로했다. 러시아는 이 대통령령으로 합법적으로 '외채 상환'을 끝냈다는 근거를 마련한 데 불과했다. 추후 국제 분쟁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유로화(위)와 루블화/사진출처:픽사베이

이런 과정을 거쳐 러시아 디폴트는 이론적으로 성립됐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선언되지는 않았다. 국제 금융거래상, 디폴트는 해당 국가가 갚지 못하겠다고 하든가(러시아 혁명후 혁명정부가 선언한 차르 부채), 다음에 갚겠다고 선언(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 채무 지급 유예 선언)하든지, 혹은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신용 평가'를 통해 현실화한다. 채권자(투자자)의 25% 이상이 돈을 못받았다(디폴트 선언)며, 법정 투쟁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도, 국제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와 피치, S&P도 디폴트를 선언하지 않았다. 서방 채권자들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진행 상황을 지켜볼 뿐, 섣불리 행동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디폴트이면서 디폴트가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실루아노프 재무장관은 아예 "서방이 러시아에 '디폴트'라는 꼬리표를 붙이기 위해 인위적인 장벽을 만든,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라고 비꼬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디폴트' 꼬리표가 붙으면 향후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금 조달상 매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미 국제 금융시장에서 거의 퇴출된 상태다. 러시아는 외화 표시 채권을 발행할 수도, 대부분 서방 국가에서 돈을 빌릴 수도 없다. 미 재무부는 지난 7일 모든 러시아 채권·주식의 매입마저 금지했다.

러시아 디폴트를 가장 적극적으로 보도한 블룸버그 통신도 "1918년 이후 100년여만에 러시아가 '디폴트'를 맞았다는 상징성 외에는 달라질 게 별로 없다"고 예측했다. 국제금융시장에 미칠 파장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경제정책위원회의 니콜라이 알레피예프 부위원장은 "디폴트는 한 국가의 지급불능, 혹은 부채를 상환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인데, 러시아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며 "인위적인 디폴트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만들어낸 '금융 사건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뜻인데, 약은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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