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우크라 전쟁의 '지뢰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
제 95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우크라 전쟁의 '지뢰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03.13 0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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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현지시간, 한국시간으로는 13일 오전 9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리는 제 95회 아카데미상(오스카상) 시상식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지뢰밭'에 갇혔다는 평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작품 경쟁에다, 작품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인기 영화 '탑건 매버릭'의 후보 자격 논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 참여 요청 등이 겹쳐서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화상 출연해 전세계 영화팬을 상대로 자국에 대한 지원을 요청할 계획이었으나 참여를 거절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 연예 전문 매체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 할리우드의 대형 에이전시인 WME의 마이크 심프슨을 통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출연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아카데미 측은 작년에도 그의 출연 요청을 거부한 바 있다.

오스카상/유튜브 캡처

그는 지난해 2월 전쟁 발발후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프랑스 칸영화제와 독일 베를린영화제에 화상 연결을 통해 우크라이나 지지 촉구 연설을 했으나, 캐나다 토론토영화제(지난해 9월)에는 거부당했다. 그는 미국 할리우드의 최대 축제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화상 참가해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을 높여보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아카데미 측은 '정치와 거리를 둔 오랜 전통'에 따라 그의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출연 요청을 아카데미 측에 전한 WME 에이전트 심프슨은 코미디언 출신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파워'(Superpower)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슈퍼파워'는 할리우드 배우 숀 펜이 에런 코프먼과 함께 연출한 다큐 영화인데, 코프먼이 WME 소속이라는 것.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또 숀 펜와 젤렌스키 대통령간의 각별한 인연도 한 몫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차례 수상한 숀 펜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세 번이나 키예프(키이우)를 찾아 젤렌스키 대통령을 격려했고, 지난달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슈퍼 파워'의 당사자인 젤렌스키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화상연설로 이끌었다.  

아카데미상 작품상 등 6개 부문에서 후보에 오른 '탑건 매버릭'에 대해서는 캐나다 토론토에 거점을 둔 우크라이나인 단체 '우크라이나 월드 콩그레스(UWC)'가 후보 자격을 문제삼았다. LA타임스에 따르면 폴 그로드 UWC 회장은 아카데미 측에 서한을 보내 "이 영화의 제작비를 러시아 올리가르히인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가 상당부분 댔다며 "러시아가 할리우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후보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볼로프레프는 포브스 선정 세계 부자 순위 389위(자산 규모 64억 달러·약 8조4500억원)로, 세계적인 염화칼륨 생산업체인 '우랄칼리' 소유자다. AS 모나코 FC(프랑스 리그 축구팀) 인수로 이름을 널리 알린 그는 번 돈을 축구 구단과 영화 제작, 미술품 수집 등에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탑건 매버릭'의 한 장면/캡처

그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사소한(?) 소송이 계기가 됐다. 미 영화제작사 '뉴리퍼블릭'의 브래들리 피셔 전 사장이 부당 해고를 이유로 지난 1월 회사를 상대로 1,500만 달러(약 198억원)의 배상 소송을 냈는데, 소장에 뉴리퍼블릭과 리볼로프레프의 긴밀한 관계가 언급됐다는 것. 뉴리퍼블릭은 지난 2020년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공동으로 '탑건 매버릭' 등 영화 10편에 대한 자금을 조달했고, 그중에서도 리볼로프레프가 최대 25%의 제작비를 제공하는 계약을 맺은 것으로 소장에 나왔다고 한다. '탑건'(1편)과는 달리, 속편인 '탑건 매버릭'에는 러시아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자금줄'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 이유다.

탑건 1편에 이어 35년 만에 나온 '탑건 매버릭'은 지난해 말 기준 전 세계에서 14억 8000만 달러(약 1조 9500억원)의 흥행수입을 올리는 등 크게 성공했다.

다큐멘터리 부분 출연 작품의 러-우크라 경쟁도 눈에 띈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1월 24일 공개한 제95회 아카데미상 다큐 부문 후보작에는 총 5편이 이름을 올렸다. 반푸틴 러시아 야권운동가 나발니를 다룬 작품 '나발니'(HBO맥스, CNN필름 공동 제작)와 우크라이나 최전방 보육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 '어 하우스 메이드 오브 스플린터스(A House Made of Splinters)'도 포함됐다. 

다큐 영화 '나발니'에 나온 나발니의 모습/유튜브 캡처
'어 하우스 메이드 오브 스플린터스'의 포스터/캡처

영화 '나발니'의 당사자인 알렉세이 나발리는 푸틴 대통령의 정적으로 꼽히는 만큼 친푸틴 성향의 작품은 아니다. 문제는 나발니의 과거 인터뷰 발언이다. '대통령이 된다면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로) 돌려주겠냐'는 질문에 그가 "크림반도가 샌드위치처럼 가져갔다가 돌려줄 수 있는 거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크게 분노한 우크라이나 측은 이 영화가 나발리의 러시아 '민족주의자' 속성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의심한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일각에서는 나발니 지지자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하면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다큐 '어 하우스 메이드 오브 스플린터스'(파편으로 만든 집)은 덴마크와 스웨덴, 핀란드, 우크라이나가 함께 제작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직전에 지은 동부 리시찬스크 지역 보육원의 아이들을 영상에 담았다. 전쟁으로 아이들은 모두 해외로 대피했고, 보육원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손된 상태라고 이 영화의 조감독 아자드 사파로프는 전했다. 전쟁으로 만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다큐 경쟁은 아카데미 측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든, '지정학적 지뢰밭'에서 벗어나지 못할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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