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 조명희 선생과 그의 손자 파벨 조 러시아 '캐피탈 그룹' 회장은..
포석 조명희 선생과 그의 손자 파벨 조 러시아 '캐피탈 그룹' 회장은..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05.1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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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구소련) '고려인 문학’의 선구자 역할을 한 포석 조명희(1894~1938) 선생의 한국 최초 창작 희곡집 '김영일의 사' 발간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문학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10일 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에서 열렸다. 행사는 ‘포석 조명희 선생 추모식’과 '제 30회 포석 조명희문학제’로 진행됐다. 

진천에 있는 포석조명희문학관/사진출처:진천군
포석 조명희 선생/사진출처:국가보훈처

동양일보에 따르면 이날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장손자 조 드미트리(포석의 차남 조선인·조 블라디미르의 아들)과 외손자 김 안드레이(포석의 장녀 조선아 씨의 아들) 등이 모스크바에서 날아왔다.

두 사람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2019년 4월 11일 포석의 차남 조 블라디미르가 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정부로부터 받은 건국훈장 애국장과 훈장 증서, 그리고 러시아 인민화가 안일 씨가 그린 포석의 초상화를 송기섭 진천군수에게 전달했다. 우리 정부는 앞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포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주러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식. 이 자리에서 포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애국장이 차남에게 수여됐다/페이스북 캡처

두 사람은 또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가 포석에게 내린 사형 선고를 공식 파기하고, 소련작가동맹이 선생의 작가 신분을 회복한다는 문서 등 구소련의 공식 문서 3건을 포석조명희문학관에 기증했다. 

포석의 종손은 충북 청주시에 본사를 둔 동양일보의 조철호 회장이지만, 러시아(소련)에서도 포석의 자손들이 각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거나 활약 중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포석의 손자인 조 파벨(Павел Тё, 조 블라디미르의 아들, 그동안 '조파엘'으로 알려졌다) '캐피탈 그룹' 회장이다. 

파벨 조 캐피탈그룹 회장/사진출처:홈페이지

RIA 노보스티 통신 부동산에 따르면 '캐피탈 그룹'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부동산 개발회사 중 하나다. 조 파벨이 지난 1993년 에두아르드 베르만과 블라디슬라프 도로닌과 함께 창업했으나, 2014년 두 사람과 결별하고, 혼자 캐피탈 그룹을 이끌고 있다. 

'캐피탈 그룹'이 또다시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달 초. 자동차 수리공장들이 모여있던 모스크바 북부 바고노레몬트(Вагоноремонт) 산업단지의 재개발 사업을 따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24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예피모프 모스크바 경제 정책 및 재산·토지 관계 부시장은 지난 달 7일 바고노레몬트 산업단지 2.71헥타르(h)의 재개발권이 '카모테스'(КАМОТЕС, KAMOTES)사에게 낙찰됐다고 발표했다. 예피모프 부시장은 "카모테스사가 "재개발 사업에 90억 루블을 투자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연간 5억 루블에 이르는 경제효과를 창출하고 1,500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카모테스사의 지분 80%를 조 파벨 회장이 보유하고 있다.

모스크바 바고노레몬트 재개발 지역/사진출처:모스크바 24
바고노리몬트 지역의 노후된 옛공장 모습/사진출처:vk

카모테스사는 모스크바시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한 뒤 이 지역 재개발에 들어갔다. 모스크바시 부동산 담당 부서는 재개발 부지에는 첨단기술 단지와 의약품 생산 시설, 쇼핑센터및 사무실 공간이 들어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1,600가구에 이르는 현대식 아파트와 쉬꼴라(초중등학교), 유치원, 체육시설, 카페 등이 건립된다. 

위키피디아 러시아판은 조 파벨 회장의 가족을 다룬 코너에서 일본 간첩의 누명을 쓰고 총살당한 할아버지 조명희를 '한국의 작가'로 소개했다. 조명희 선생은 1921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친일파를 응징할 목적으로 조직된 의권단(義拳團)에서 활동했으며, 귀국 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에 참여했다.

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8년 8월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민족신문 ‘선봉’지의 주필과 소비예트 문사동맹 원동관리부 조선인 지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시와 소설을 창작했다. 그러나 1937년 9월 18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돼 이듬해 5월 11일 총살당했다. 그 전까지 그는 '낙동강', '짓밟힌 고려', '녀자공격대'등의 작품을 통해 국내외에서 항일 독립의식을 심었다.

조명희 선생은 1956년 7월 20일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재판소에 의해 사후 복권됐으며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에게는 ‘항일투쟁영웅 59인’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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