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장학금 설립 계기가 된 최재형 선생
연해주 장학금 설립 계기가 된 최재형 선생
  • 이진희
  • jhnews@naver.com
  • 승인 2014.07.04 0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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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일 서울 양재동의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최재형 장학회 창립 3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최재형 장학회는 김창송 성원교역 회장이 회장을 맡고 실무는 황광석(52) 이사가 총괄한다. 황 이사는 중국 조선족과 러시아의 고려인(한인), 재일동포 등 해외 동포들을 연결하고 돕기 위해 2001년 설립한 ‘동북아 평화연대’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황 이사와 관련 자료에 따르면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집안 자식으로 태어난 최재형은 가뭄과 기근이 심했던 1869년 가족들과 연해주 한인마을 지신허로 이주했다. 11살에 집을 뛰쳐나와 러시아 무역상선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선원이 됐고, 이후 6년간 세계를 돌아다녔다. 배에서 내린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무역상사에서 일하다 블라디보스토크 산하 얀치혜 마을 도로공사에서 통역관 겸 관리책임자가 됐고, 이때 능력을 인정받아 얀치혜의 마을이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인텔리인데다 러시아어에 능통했고 성실해 한인들 사이에 신망도 높았다. 특히 러시아 당국이 당시 공사장에 대거 투입된 한인 노무자들 관리를 최재형에게 맡겼는데, 제대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렇게 승승장구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군 식료품 납품을 맡는등 사업을 벌여 연해주 최고의 아시아인 갑부가 되었고, 때마침 불어닥친 독립운동 바람에 뛰어들어 각종 항일단체의 대표를 맡았다. 이때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페치카’ 즉 러시아 난로였다. 그는 러시아 한인들의 정신적, 재정적 지주였던 것이다. 그는 한인대표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도 참석해 러시아정부 훈장까지 받았다.

그의 운명은 1904~1905년 러일전쟁 이후 항일독립운동에 본격 가담하면서 바뀐다. 당시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이 부총장, 헤이그 밀사였던 이위종이 회장을 맡았던 연해주의 의병조직 ‘동의회’에서 총장을 맡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를 전폭 지원하고 그 가족을 돌봤다.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와 함께 전러시아 한족대표자회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14년엔 러시아 한인들의 이주 50주년 기념회 회장으로 기념행사 조직위원회를 만들었다. 올해가 기념행사 조직위 창립 100주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볼셰비키 혁명 뒤 서방의 반혁명 개입으로 어수선했던 1920년 연해주를 침입한 일본군이 러시아 국적의 최재형을 체포해 바로 처형해 버렸다. 그가 러시아 한인 저항세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뿌리를 뽑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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