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부동산 투자 실패서 배운다, 이원형 변호사가 투자금 일부 회수했다?..
러시아 부동산 투자 실패서 배운다, 이원형 변호사가 투자금 일부 회수했다?..
  • 이진희
  • jhnews@naver.com
  • 승인 2015.06.24 05:48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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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이원형 러시아 변호사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투자했던 우리나라 기관 투자금 투자금 120억원을 회수하는 데 앞장서 성공을 시켰다고 한다. 한 인터넷 매체에 따르면 이 변호사는 러시아의 대형 부동산 개발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무산되면서 묶였던 우리나라 투자금을 회수해 왔다고 한다.

그 스토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00년대 초중반은 러시아도 부동산 개발 절정기였다. 러시아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주요 도시에 있는 부동산을 매입해 개발한 뒤 되팔거나, 매입한 상가 건물 임대료 등으로 큰 돈을 모으면서 소위 '재벌' 급 기업으로 승승장구했다.

이때 우리나라 기관투자자들도 러시아 부동산 투자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마치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으로 큰 손해를 본 증권회사 등 금융투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물론 1998년과 달리, 이번에는 러시아 자체 문제가 아니었다. 리먼브라더스 파산에 따른 미국발 금융위기였으니, 투자 시기의 적정성만 빼면 투자 실패는 예측 불가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러시아 부동산 투자는 이렇게 진행됐다. 한국의 개발 시행사가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등 주요 도시의 개발 부지를 매입하고, 자산운용사가 사업성을 검토한 뒤 펀드를 만들어 투자했다. 펀드는 물론 개인 혹은 기업 투자자들에게 팔렸다. 한국개발사는 투자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지 기업이나 부동산 개발사와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이 변호사가 맡은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과 러시아 합작법인 시행사인 '리코프스키개발주식회사'(국내 SPC)는 2007년 말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업무중심지역에 주거, 오피스, 상업시설 등이 들어 있는 복합건물 개발사업을 진행했다. 마이어자산운용(현 리치먼드자산운용)이 2008년 6월 '마이어사모러시아펀드1'를 만들어 투자자 유치에 나섰고, 인허가 완료후 2차브릿지를 통해 투자금을 상환하는 구조였다.

되돌아보면 2008년은 이미 미국발 금융위기가 엄습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투자기간은 1년이어서,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큰 수익을 올리는 것이 확실했다. 현지 파트너도 에코프롬(ECOPROM)그룹 미하일 바브로프스키 회장이었다. 국내에서는 더케이손해보험 등 4개 기관투자자가 총 240억원을 투자했다. 투자금은 수탁은행인 우리은행에 보관됐고, 우리은행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매입한 부동산을 담보로 잡았다. 바브로프스키 회장 소유의 부동산도 담보권을 설정했다. 

사업의 시작은 순탄했다. 그러나 몇달 뒤인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졌다. 사업은 곧바로 위기를 맞았다. 러시아 등 전세계 부동산은 폭락하고 개발은 중단됐다. 담보가 설정된 부동산 매각도 쉽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상태로 시간이 흐르자 러시아측 파트너인 바브로프스키 회장이 2010년 3월 개발 시행사인 리코프스키개발을 상대로 계약해지 소송을 냈다. 이미 리코프스키개발은 공중분해된 상태였다.

뒤늦게 소송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투자알선업체인 마이어자산운용이 대응에 나섰다.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로펌을 통해 소송을 진행했으나 1년여 동안 좀체 진전이 없자 마이어자산운용 관계자가 이 변호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변호사는 혼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법원 판사와 관계당국 실무자들을 만나 설득하고, 재판을 속행했다. 그 결과,  2011년 3월 1심 법원은 "계약을 해지하고 대금을 일부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2심에서는 "계약을 해지하고 대금 전부를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이 변호사의 완승이었다. 

바브로프스키 회장이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자, 마이어자산운용은 의외의 선택을 했다. 이 변호사 대신 러시아로펌을 선임해 소송을 맡긴 것이다. 

반전이 일어났다. 러시아 대법원에서 소송이 진행되던 2012년 9월, 국내에서는 일반 투자자들이 마이어자산운용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동시에 투자자들이 이 변호사를 찾아와, 어떻게든 결말을 빨리 내달라고 부탁했다. 러시아 대법원 소송은 언제 끝날지 장담할 수 없었고 4년 가까이 방치된 개발 사업을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은 여러 면에서 손해가 막심했다. 손해를 줄이고 투자금 중 일부라도 회수하는 것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바브로프스키 회장과의 중재를 원했다. 이 변호사는 바브로프스키 회장을 만났다. 한국 투자자들의 투자금을 돌려주는 대신, 우리은행이 담보로 잡고 있던 바브로프스키 회장의 부동산과 한국 투자자들의 투자금으로 매입한 부동산의 담보권을 모두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양측은 2014년 1월 이 제안에 잠정 합의했다. 그해 6월20일 최종 합의가 이뤄지면서 러시아와 한국에서의 소송이 모두 취하됐다. 3일 뒤 한국 투자자들의 투자금 120억원이 회수됐다. 최초 투자금액의 절반이었다. 

그후 이 변호사는 지난 1년간 러시아와 한국을 오가며 개발 대상 부지의 담보권을 넘기는 절차를 진행했다. 오는 20일이면 개발 대상 부동산 소유권이 모두 바브로프스키 회장 측으로 이전된다고 한다. 투자사업이 중단된 지 6년, 소송이 시작된 지 5년만이다. 

우리 나라 측에서 보면 1998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240억원을 투자해 절반을 날린 셈이다. 그나마 투자금의 절반만이라도 되찾은 것이 다행이라고 한다. 이 변호사가 진짜 소송 진행을 잘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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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 2015-06-29 20:45:58
이원형 변호사는 러시아 유학 1세대다. 소련 붕괴직후인 1991년 러시아로 건너가 1994년 모스크바 국립대 국제사법학과를 졸업했다. 유학시기부터 따지면 벌써 25년째 러시아와의 인연이다.
이 변호사는 “유학 초기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살 수 없어서 암시장에 풀린 독일제 냉동 닭 수백 조각을 사 수개월 간 볶아먹고 삶아 먹고 튀겨먹었다. ‘모스크바 닭요리 전문가’라는 달갑지 않은 애칭도 얻었다”고 말한다.

이진희 2015-06-29 20:45:58
이원형 변호사는 러시아 유학 1세대다. 소련 붕괴직후인 1991년 러시아로 건너가 1994년 모스크바 국립대 국제사법학과를 졸업했다. 유학시기부터 따지면 벌써 25년째 러시아와의 인연이다.
이 변호사는 “유학 초기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살 수 없어서 암시장에 풀린 독일제 냉동 닭 수백 조각을 사 수개월 간 볶아먹고 삶아 먹고 튀겨먹었다. ‘모스크바 닭요리 전문가’라는 달갑지 않은 애칭도 얻었다”고 말한다.

이진희 2015-06-29 20:45:58
이원형 변호사는 러시아 유학 1세대다. 소련 붕괴직후인 1991년 러시아로 건너가 1994년 모스크바 국립대 국제사법학과를 졸업했다. 유학시기부터 따지면 벌써 25년째 러시아와의 인연이다.
이 변호사는 “유학 초기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살 수 없어서 암시장에 풀린 독일제 냉동 닭 수백 조각을 사 수개월 간 볶아먹고 삶아 먹고 튀겨먹었다. ‘모스크바 닭요리 전문가’라는 달갑지 않은 애칭도 얻었다”고 말한다.

이진희 2015-06-29 20:45:58
이원형 변호사는 러시아 유학 1세대다. 소련 붕괴직후인 1991년 러시아로 건너가 1994년 모스크바 국립대 국제사법학과를 졸업했다. 유학시기부터 따지면 벌써 25년째 러시아와의 인연이다.
이 변호사는 “유학 초기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살 수 없어서 암시장에 풀린 독일제 냉동 닭 수백 조각을 사 수개월 간 볶아먹고 삶아 먹고 튀겨먹었다. ‘모스크바 닭요리 전문가’라는 달갑지 않은 애칭도 얻었다”고 말한다.

이진희 2015-06-29 20:45:58
이원형 변호사는 러시아 유학 1세대다. 소련 붕괴직후인 1991년 러시아로 건너가 1994년 모스크바 국립대 국제사법학과를 졸업했다. 유학시기부터 따지면 벌써 25년째 러시아와의 인연이다.
이 변호사는 “유학 초기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살 수 없어서 암시장에 풀린 독일제 냉동 닭 수백 조각을 사 수개월 간 볶아먹고 삶아 먹고 튀겨먹었다. ‘모스크바 닭요리 전문가’라는 달갑지 않은 애칭도 얻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