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대외정책문서보관소 기록을 토대로 본 아관파관의 새로운 해석 논문/김영수
러 대외정책문서보관소 기록을 토대로 본 아관파관의 새로운 해석 논문/김영수
  • 이진희
  • jhnews@naver.com
  • 승인 2016.09.26 0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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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지금까지 알려진 카를 베베르 러시아 공사가 아니라, 그의 후임인 알렉세이 스페예르 공사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동해연구실장은 23일 상명대 역사문화연구소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 '주한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의 외교활동과 한국정책'에서 "아관파천 직전 정황을 살펴볼 때 러시아측 핵심 인물은 스페예르 공사였다"고 단언한다. 김 실장은 스페예르의 아관파천 보고서 등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의 기록을 토대로 그의 외교활동을 복원했다. 

그의 논문에 따르면 아관파천이 있었던 1896년 2월11일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는 베베르가 아닌 스페예르였다. 스페예르는 1895년 7월 베베르의 뒤를 이어 주한 공사로 임명됐고, 베베르는 당시 '대기발령' 상태로 한국에 머물며 비공식 외교 자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러시아측 문서기록에 따르면 고종은 1896년 1월9일 "러시아로부터 도움을 기다리고 있으며,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는 내용의 비밀편지를 스페예르에게 보낸다. 스페예르는 2월1일 고종을 접견한 뒤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해군중장 알렉세예프에게 "고종이 폭동 탓에 위험하니 함정을 제물포로 신속히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2월2일 고종의 편지를 받고 피신 의사를 본국 외무대신에게 전한 인물도 스페예르였다. 그는 그러나 러시아 공관을 방어할 해군을 한양까지 불러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외무부 명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고종을 피신시켰다. 

러시아 정부는 아관파천을 나중에 보고받고 승인했다. 대신 러시아는 스페예르를 곧바로 주일 공사로 발령을 내 책임을 묻고, 모든 일을 베베르 전공사가 한 것처럼 꾸민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당시 일본과 우호관계를 형성하고, 한국에서는 현상유지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예르는 '러시아가 조선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소신 아래 아관파천을 결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스페예르는 또 일본에서도 고종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종은 1897년 봄 당시 주일 공사 스페예르에게 황제 칭호 선포 계획에 대한 자문을 구한다. 스페예르는 고종에게 하사받은 어진(고종의 초상화)을 주일 공관에 모셔놓고 당시 공관을 방문한 러시아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또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음모'를 조선민족의 특징 중 하나로 꼽고, 고종을 포함한 지배계급에 뇌물은 필수적이라며 부정적인 보고를 올렸고, 부정부패 탓에 자주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도덕적 수준을 확립할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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