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돌아온 소년의 증언-서울신문
살아돌아온 소년의 증언-서울신문
  • 이진희
  • jinhlee@hk.co.kr
  • 승인 2004.09.12 0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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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앞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던 러시아 소년. 30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인질극 현장에서 누구도 소년이 살아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옥의 학교’에서도 한 줄기 살 길은 있었다.

지난 1일(현지시간) 러시아 북오세티야 베슬란의 제1학교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열살짜리 소년 게오르그 파르니예프의 얘기다. 그는 이날 개학식을 맞아 신나게 학교에 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갑자기 무장괴한들이 운동장으로 들이닥치면서 학교는 지옥으로 변했다. 인질범들은 총질을 하면서 1000명이 넘는 학생과 학부모,교사들을 강제로 체육관으로 몰아넣었다. “첫 희생자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남자였다. 비명을 지르며 엄마 품으로 달려가던 소녀도 총탄에 맞아 숨졌다. ”고 게오르그는 9일 모스크바의 병원으로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생생하게 증언했다.

체육관 안에서 게오르그의 자리는 하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폭탄을 터트릴 기폭장치를 발로 밟고 있는 인질범의 바로 앞이었다. 그가 발을 떼면 게오르그는 가장 먼저 목숨을 잃게 될 참이었다. 양손을 머리에 얹은 채 겁에 질려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7일 공개된 현장 비디오테이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흘째 되던 날 갈증을 참지 못한 게오르그는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뜻밖에도’ 한 인질범이 게오르그를 수도가 있는 교실로 데려가는 호의를 베풀었다. 소년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물을 마시고 체육관으로 돌아오는 순간 농구 골대에 매달린 대형폭탄이 터졌다. 게오르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불과 4.5m 앞 공중에서 터진 폭탄의 파편들이 소년의 머리 위로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이어 진압작전이 시작됐고 체육관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빗발치는 총알과 폭탄을 피해 식당으로 도망친 게오르그는 부엌의 벽장 속에 숨었다. 도망치다가 왼팔과 오른쪽 무릎에 폭탄 파편을 맞은 게오르그는 겨우 팔에 박힌 파편을 빼냈다. 소년은 “인질범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생쥐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고 설명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누군가 게오르그의 손을 잡았다. “인질범인 줄 알고 ‘이제 죽는구나.’하고 생각했다. ”고 게오르그는 공포의 순간을 떠올렸다. 하지만 게오르그를 잡은 것은 학교 안으로 진입한 러시아 군인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소년은 무사히 빠져 나와 안전한 지역으로 옮겨졌다. 게오르그는 “다치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살았다. ”고 웃으면서도 “내가 본 장면들이 악몽으로 되살아날까 두렵다. ”고 치를 떨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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