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꿈에서 국무장관이 되기까지
피아니스트 꿈에서 국무장관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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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1.18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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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는 라이스 보좌관의 국무장관 ㅂㄹ탁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를 법무장관에 임명한 것에 비견하면서 "라이스 보좌관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이후 그 누구보다 대통령과 가까운 국무장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흑인 차별이 여전히 심했던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갖출 수 있었을까. 그의 고조모는 하녀로 일했다. 고조모뿐만이 아니라 그의 조상들 대부분이 백인들의 집안 일을 돌보던 하인이었다.

그러나 자손들에게 만큼은 구차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자식 교육에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세대가 지나면서 라이스가의 교육열은 점점 더해졌고 유색인종이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아 이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목화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자식의 학비를 댔고 마침내 자손 중 한 명이 장로교 목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가 바로 콘돌리자 라이스의 아버지다.

라이스는 1954년 인종차별이 극심하기로 유명했던 미국 앨라배마 버밍험에서 장로교 목사 아버지와 음대 교수 어머니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3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을 정도로 피아노에 심취한 것으로 전해진다.

콘돌리자(애칭은 콘디)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지었다.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간 연주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이탈리아어인 '콘돌체자'(con dolcezza·부드럽게 연주하라는 의미)에서 딸의 이름을 따왔다.

콘디는 2002년 세계적 첼리스트 요요마와 협주했을 정도로 피아노 실력이 뛰어나다. 이름에서부터 음악과 가까운 콘디는 피아노 교사였던 외할머니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친해졌다.

음 감각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앞에 앉아 양손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외할머니가 연주하는 모습을 흉내내곤 했다. 이를 유심히 관찰하던 외할머니는 일찌감치 콘디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네 살 때 첫 연주회를 열 정도였다.

그들은 콘디가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음악, 발레, 외국어, 스포츠 등을 가르쳤다. 그의 부모는 스케이트까지 가르쳤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콘디가 많은 책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글을 깨치기 전부터 피아노 악보를 읽어서인지 콘디는 책읽기도 수월하게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각 학년의 필독서로 선정된 도서목록에 따라 문학 작품을 읽었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콘디는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책읽기를 즐겼고, 책을 통해 배운 지식과 간접 경험들은 그가 한층 더 성숙한 인간이 되는 토대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흑인의 신분이었기에 어려서부터 콘디는 '두 배는 더 열심히'라는 인생관을 갖고 모든 일에 임했다고 한다.

약술한바, 콘디의 부모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가운데도 언젠가는 흑인이 높은 사회적 위치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자식 교육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콘돌리자 라이스는 이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15세에 덴버대학을 조기 입학할 때까지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던 라이스는 흑인 최초로 버밍햄 음악학교에 입학했지만 자신이 흑인이라는 점에 한계를 느끼고 꿈을 바꾸게 된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의 아버지인 조지프 코벨 교수의 영향을 받아 국제정치학으로 전공을 변경하게 된 것이다.

라이스는 덴버 대학과 노틀담 대학에서 정치학과 국제학을 전공했으며, 노틀담 대학에서 석사, 덴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불과 26살이란 나이에 소련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곧바로 명문 스탠포드 대학교의 정치학 부교수가 돼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그녀는 학계에서 러시아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976년 대선 때만 해도 그는 민주당원으로 지미 카터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카터 대통령의 대응에 실망해 1980년대선 때 '강력한 힘'을 주창하는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 이끌려 공화당원이 됐다.

라이스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34세에 조지 H 부시 행정부 당시 소련 자문역을 맡아 정계에 입문한 라이스는 탄탄한 지식과 반대파를 끌어들이는 데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1989년 몰타 미소 정상회담에서 라이스를 만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은 훗날 "그녀는 내가 아는 소련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며 라이스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스탠포드 대학으로 돌아가 1993∼99년 학장까지 지냈으나 조지 W 부시가 2000년 대권에 도전하자 정계로 복귀했다.

라이스는 부시 대통령 부자(父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대선 후보자 시절부터 외교분야 가정교사 역할을 수행해온 그는 부시 대통령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핵심 측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캠프데이비드 별장, 텍사스 크로포드 목장 등에서 시간을 보낼 때 항상 함께 있었다. 이 때문에 부시 대통령과 그는 단순한 대통령과 보좌관의 관계를 뛰어넘는 인간적 유대를 맺고 있다.

라이스는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시절인 89∼91년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붕괴 직전의 소련과 동유럽권 담당 국장으로 일하면서 부시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아버지 부시 밑에서는 외교정책 보좌관으로서 소련 해체와 베를린장벽 붕괴의 역사적 사건을 지켜봤으며, 2000년 부시 현 대통령의 선거운동 기간부터 줄곧 외교문제 자문역을 맡아왔다. 부시와 함께 백악관에 입성하여 안보 보좌관으로서 9·11사태 수습과 이라크전쟁의 승리를 일궈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은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와의 회견에서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무기 산업과 석유 자본을 즐겁게 하려는 동기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역시 이라크 공격의 비밀스런 동기는 바로 '검은 황금'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을 상당수가 불순한 의도로 간주하고 있는 데에는 바로 사활을 건 석유자원의 확보와 절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부시 정권은 석유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석유가 없으면 미국 경제가 무너진다는 것은 물론 미국의 석유산업이 등을 돌리면 자기들의 권력도 끝장임을 익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 중 상당수가 석유산업계 출신이고, 막대한 석유로비의 자금을 가지고 권좌에 올랐다. 부시는 작은 석유회사를 경영했고, 부통령 딕 체니는 수년간 석유기업의 대표이사를 지냈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8년간 석유콘체른 '셰브론텍사코'의 감사를 지냈고, 유조선에 자기 이름을 붙이는 영예도 얻었다.

한국의 LG정유 주식지분의 과반을 점하고 있기도 한 셰브론텍사코 사는 미국 내 2대 석유메이저 기업이며 2003?매출액은 1천218억달러, 순이익은 72억달러로 세계 4위의 순이익을 기록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라크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이라크의 석유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라크 석유에 세계 4위 매장량의 쿠웨이트,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해 진출한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의 석유까지 합하면 미국은 세계 에너지 수급 체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오랜 숙제인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카르텔을 무력화 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라크 공격은 '국제 석유 질서' 재편이라는 대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사실상 미국의 승리로 판가름 난 2003년 4월 13일 뉴욕타임즈는 사설에서 향후 미국 대외정책의 중대한 분수령은 "미국이 자신의 칼을 마구 휘두르지 않는 지혜와 자제력을 갖게될 것"인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선제공격'전략을 넘어선 '예방 전쟁'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즈는 2003년 3월 17일자 기사에서 "선제공격 전략은 자신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을 때 자위적 차원에서 먼저 공격할 권리"인 반면에 "예방 전쟁은 언젠가는 강해질 것을 우려하는 잠재적인 적에 대해 강대국이 벌이는 전쟁"이라며 둘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큰 저항 없이 이라크를 점령한 부시 행정부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려고 하는 북한, 이란, 시리아 등은 이라크로부터 적절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고 노골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순순히 미국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라크와 비슷한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대표적인 '비둘기파'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물러나고 후임자로 '매파'로 알려진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내정된 것으로 16일 알려지면서 부시 2기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1기에 비해 훨씬 강경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온건파인 파월의 존재로 균형을 이뤘던 부시 행정부의 외교노선이 강경 기류로 흐를 것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이런 관측의 배경에는 파월 퇴임으로 2기 행정부에서 강경파인 딕 체니 부통령을 견제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분석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라이스를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같은 강경파 쪽에 함께 묶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많다. 우선 라이스 보좌관이 보수파라고 해도 실용적인 측면이 강한데다 이념적으로 네오콘으로 무장되지 않았고 지난 4년간 백악관에서 파월과 체니-럼스펠드 라인간 이견을 조정하는 등 외교안보정책을 조율해오면서 '중도'를 표방해 온 인물이라는 게 주된 이유다.

라이스 보좌관이 매일 매일 예민한 외교업무를 다루는 국무장관으로 확정될 경우 현실 외교의 중요성에 인식을 새로이 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기존 국무부 대북 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라크처럼 무력을 사용하기도 쉽지 않고, 제재와 봉쇄를 통해 북한의 붕괴를 유도하는 것도 현실적 선택이 되기 힘들다는 점에 부시 행정부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결국 극적인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는 한, 그리고 부시 행정부가 대북한 군사 행동에 나설 수 있는 군사력과 외교력을 갖추었다는 판단을 갖게 되면 한반도 위기는 급랭정국으로 소용돌이치게 될 것이다.

"저는 콘디를 선택했어요. 그녀는 소련의 역사와 정치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목적 의식을 가지고 핵심을 꿰뚫는 유연한 자세와 균형감각으로 현안 문제에 대처했으니까요. 군사 문제에 대한 그녀의 탁월한 식견은 현재에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전직 안보 보좌관 브렌트 스카우크로포트) "콘디는 아주 현명해요. 큰 사건을 해결하는 요령과 방법을 알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녀가 설명하면 모두가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부시 前 대통령)

이들의 말따라 19세 덴버대 우등 졸업, 26세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스탠퍼드대 부교수 임용, 34세 조지 H 부시 전 행정부 국가안보위 소련 자문역, 38세 스탠퍼드대 최연소 부총장, 46세 첫 여성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50세 국무장관을 목전에 두고 있는 라이스 최종 종착역은 어디일까?

밥 우드워드 워싱턴 포스트 부국장은 저서 '공격 명령'에서 라이스 보좌관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눈과 귀를 장악했다고 묘사할 정도로 부시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으면서 워싱턴 정가에서 차기 부통령, 더 나아가 미래의 대통령으로 거론되고 있기에 그녀의 한 걸음 한 걸음 자체가 모두 주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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