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기사-왜 혁명엔 색깔론인가?
중앙일보 기사-왜 혁명엔 색깔론인가?
  • 이진희
  • jinhlee@hk.co.kr
  • 승인 2005.03.2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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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에서 15년 동안 독재 권력을 휘둘러온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이 24일 시민들의 '레몬 혁명'으로 무너졌다. 2003년 11월 그루지야의 '장미 혁명'과 2004년 12월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에 이어 옛 소련 국가에서 발생한 세 번째 민주화 혁명이다.

특히 이번 혁명은 외부 지원 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시민봉기라는 점에서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등 인접 국가로 확산될지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시민혁명 후 폭력시위가 그치지 않아 향후 민주주의 행로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4.19혁명과 닮은 꼴=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 혁명의 경우 각각 미하일 사카슈빌리와 빅토르 유셴코라는 강력한 야당 지도자가 있었다. 그러나 키르기스스탄의 시민 혁명에선 대표적인 지도자나 주도 세력이 없다.

아카예프에 반대하는 여러 야당 지도자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는 양상이다. 시민들의 민주화 역량도 부족하다. 독재자의 장기 집권에 염증을 느낀 민초들이 부정선거를 도화선으로 '욱'하고 들고 일어난 측면이 강하다. 수도 비슈케크 등 전국에는 24일 약탈과 방화가 잇따르는 등 극심한 혼란이 벌어졌다.

정국수습 나선 야당=키르기스스탄 의회는 25일 비상회의를 열고 야당 지도자인 쿠르만베크 바키예프를 대통령 직무대행, 또 다른 야당지도자인 펠릭스 쿨로프를 내무장관에 각각 임명해 국정 수습에 나섰다. 야당 지도부는 새 대통령 선거를 6월에 치르겠다고 밝혔으나 이때까지 정국이 안정을 되찾을지 미지수다.

한편 아카예프 대통령은 25일 오후 행방불명 이후 처음으로 연 현지 통신과의 회견에서 "본인은 대통령직 사퇴 문서에 서명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아카예프는 현재 카자흐스탄 북부 휴양도시에 머물고 있으나 곧 러시아로 망명할 것이라고 러시아 인테르팍스통신이 보도했다.

◆미국.러시아 시각=키르기스스탄에 모두 군사 기지를 갖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며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키르기스스탄의 새 야당 지도자들을 잘 알고 있다"며 "이들이 하루빨리 정국을 장악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애덤 애럴리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미국은 이번 혁명의 숨은 주도자가 아니다"라며 "키르기스스탄의 안정과 민주주의가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최원기 기자
cjyou@joongang.co.kr

민주화는'컬러 혁명'

미국 언론 뉴욕 타임스(NYT)가 최근 전 세계 곳곳에서 확산되는 민주혁명의 특징을 요약한 말이다. 여러 민주혁명에서 민주화 세력을 특징하는 색깔이 유난히 눈에 띄기 때문이다. 시위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격변이나 움직임에도 특정 색이 등장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총선을 '퍼플(보라색) 혁명'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유권자들이 투표할 때 손가락 끝에 묻히는 진보라색(퍼플) 잉크에서 나온 말이다. 이란에선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에 맞서 화사한 분홍색 옷을 입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핑크 혁명'이란 말이 생겼다.

◆색마다 사연 있다=키르기스스탄 반정부 시위에서 노란색이 상징색이 된 건 반정부 학생단체 켈켈 덕분이다. 노란색은 변화를 상징한다. 이들은 시위 현장에 레몬 22㎏을 날라와 시위대와 경찰 등에게 나눠줬다. '황색(yellow) 혁명'이라고도 한다. 일부에선 '튤립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위 현장에서 직접 쓰이지는 않았지만 키르기스스탄에는 튤립이 60여 종이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시위대가 오렌지색을 택한 것은 이 색이 혁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우크라이나의 전통적 상징색인 파란색.노란색과 뚜렷이 구분된다는 이유로 채택됐다고 한다.

2003년 그루지야의 '장미 혁명'은 '색깔 혁명'의 원조 격이다. 시위대는 장미가 평화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진압 군인들은 시위대로부터 붉은 장미를 나눠 받고 총부리를 거뒀다. 당시 야권 지도자 미하일 사카슈빌리는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행진을 하면서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왜 색깔인가=대규모 민중 시위와 특정 색의 짝짓기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뉴욕 타임스는 "시각 매체가 발달한 시대에 눈길을 잡아끄는 색을 통해 전 세계에 확실한 메시지를 보내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분석했다.

또 "통일된 색은 연대의식을 보여줄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라고 전했다. 그러나 특정 색을 혁명의 상징으로 만드는 것이 서구의 음모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대부분의 시위가 친서방화 경향을 띠고 있어서다.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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