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은 인구 500만명에 북쪽으로 카자흐스탄, 남쪽으로 중국과 접경하고 있는 큼직한 오지로서 평소에는 외부인들이 관심을 둘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이 민주주의 투사나 약탈자 무리 등 다양하게 불리는 시위대에 의해 축출되는 사태는 다수의 옛 소련 공화국에 일어나는 민주화 추세의 일부로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물론 우리는 이번 사태를 민주주의 투쟁으로 규정하고 그 성공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키르기스스탄과 다른 많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그와 아주 다른 좀더 심오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기에 앞서 먼저 나의 개인적인 경험담을 말하겠다.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인 1986년 나는 아주 특이한 상황에서 극작가 아서 밀러와 배우 피터 유스티노프,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 등과 함께 후일 ‘이삭-쿨 포럼’으로 알려진 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당시 키르기지아로 불리던 그곳에 갔다. 이 포럼은 많은 존경을 받던 키르기스스탄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칭기스 아이트마토프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 포럼에서 나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지금 전개되고 있는 지식기반 경제에 토대를 둔 제3의 물결 등 세 가지 큰 변화의 물결에 관해 연설했다. 나는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게 되면 기존의 엘리트들과 과거의 물결을 위해 고안된 경제·정치·문화 제도들이 도전을 받게 되며, 그 결과 구 질서의 수혜자들과 변혁을 추구하는 혁명가들 사이에 ‘물결의 충돌’이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모든 연설이 끝난 후 러시아 측 주최자들은 우리들에게 21세기가 급속히 다가오고 있고, 지식인들은 국민들이 거기에 대비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극히 평범한 선언문에 모두 서명할 것을 요청했다. 그 문안은 전혀 문제가 없었으므로 구태여 서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문구를 삽입해야만 서명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휘갈겨 쓴 그 구절은 지식인들이 정치적 억압에 대한 두려움 없이 토론하고 이견을 말하고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수한 지식인이 정권을 비판한다고 해서 죽거나 수용소군도로 보내지던 나라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최자들은 당황하기는커녕 흔쾌히 그 문구를 추가했고, 아이트마토프를 비롯한 모든 참석자는 그 문서에 서명했다. 이어 우리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당시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된 지 1년이 된 마하일 고르바초프와 예기치 않은 2시간30분의 면담을 가졌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촉구했고, 미국 등 여타 세계와 소련 국민들은 이러한 민주화 조치에 대해 의심쩍어했다.
다음날 고르바초프와 우리가 면담한 사진과 내가 추가한 구절을 포함한 선언문 전문이 소련의 모든 주요 신문 1면에 초특호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이 기회를 이용해 외부세계에 자신이 진지하게 민주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했다.
이제 오늘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키르기스스탄 사태의 경우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내가 오래 전에 그곳에서 말했던 그 물결의 충돌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간단히 말해 키르기스스탄 사태는 제1 물결의 농민계층과 제2 물결의 산업계층의 충돌이다. 또 제3 물결의 상징물인 인터넷 카페와 ATM 장치 등이 일부 약탈자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은 좀더 복합적인 물결의 충돌을 함축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美 미래학자)
저작권자 © 바이러시아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