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패배자의 1호는 역시 고르바초프다
위대한 패배자의 1호는 역시 고르바초프다
  • 이진희
  • jinhlee@hk.co.kr
  • 승인 2005.10.0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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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와 옐친을 보면 고르바초프는 위대한 패배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옐친은 무지막지한 행동과 겉으로 드러난 것 보다 훨씬 못한 내면을 갖고 있음에도 거의 영웅 대접을 받는다. 최근들어 옐친보다 고르비가 낫다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러시아에서 조금씩, 나오고 있지만 세계적으로는 아직 그렇다.

이러한 점에 착안해 독일 주간지 ‘슈테른’ 주필과 일간지 ‘벨트’ 편집국장을 지낸 볼프 슈나이더는 역사 속의 패자들, 아이러닉한 영웅들에 주목한다.

책 위대한 패배자 /볼프 슈나이더 지음 ㅣ 박종대 옮김 ㅣ 을유문화사 ㅣ 400쪽 ㅣ 1만5000원 는 승리를 원했지만 좀 더 강한 자에게 가로막혀 꿈을 접어야 했거나, 자신이 이룩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인물들을 조명했다.

저자는 “정상에 오르는 데만 혈안이 된 사람보다, 승복할 줄 알고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에게 더 호감이 간다”고 말한다.

그가 손꼽는 첫번째 패자는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지명된 그는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소비에트 체제 개조에 나섰다. 상류층의 특권과 재산을 공격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시켰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한 것이 그 정책의 영향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개혁이란 파충류 껍질처럼 단단한 국가·당·경제 시스템의 극심한 저항을 이겨내야 할 뿐 아니라 우리들의 습관, 이데올로기적 선입견, 독선과 아집, 그리고 무사 안일한 생활태도와 싸우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많은 서구인들은 동구권 국가에 자유를 선사하고 독일 통일을 지원했으며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려 세계평화에 기여했다는 이유에서 고르바초프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 그의 명성은 추락했다. 제국의 붕괴는 물론, 빈곤과 부패까지 고스란히 고르바초프의 책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패와 요절’이란 비극적 영웅의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실패자는 체 게바라다. 쿠바 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게바라는 중앙은행장과 산업부장관까지 지낸 화려한 이력을 뒤로 하고 콩고와 볼리비아로 떠난다.

“나는 삶을 떨쳐버릴 수 없는 습관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고 외치던 게바라는 그러나 그가 해방시키려던 인디오들의 밀고로 정부군에 쫓겨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최후를 맞는다. 게바라는 걸핏하면 총을 뽑아드는 다혈질에 직접 사형을 집행하는 잔인한 처단자였지만, 비극적 최후와 혁명에 대한 헌신으로 ‘밀림의 로빈 후드’ ‘혁명의 순교자’란 후광이 보태졌다.

승리를 사기 당한 패배자들도 있다. 저자는 “전화를 발명한 세 사람 가운데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쥔 사람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비양심적인 인물이었다”고 못박는다. 그레이엄 벨은 이탈리아계 미국인 안토니오 메우치의 실험실에서 일하면서 제대로 작동하는 전화기를 처음 봤다. 메우치는 그 전화기로 1871년 특허를 따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메우치는 발명품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고, 특허권은 1874년 효력이 정지됐다. 그 틈을 타 1876년 벨이 전화 특허권을 따냈다.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도 노벨상을 강탈당했다. 동갑내기 독일 화학자인 오토 한 박사와의 공동 연구로 ‘핵분열’을 입증했고 원자폭탄 제조의 이론적 토대를 닦았지만 노벨상은 오토 한에게만 주어졌다. 오토 한은 수상소감에서조차 마이트너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마이트너는 친구들에게 “나는 오토가 떨쳐 버리고 싶어하는 과거의 일부가 됐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라고 했다.

아들에게 명성을 빼앗긴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동생 토마스 만의 그늘 아래 살아야 했던 형 하인리히 만, 친구 괴테에게 발길질 당한 천재 작가 라인홀트 렌츠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몰린 패배자들의 고통은 더욱 쓰라리다.

1등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확률적으로’ 패자일 가능성이 높은 보통사람들에게 저자는 최고의 위로를 들려준다. “승리자로 가득 찬 세상보다 나쁜 것은 없다. 그나마 삶을 참을 만하게 만드는 것은 패배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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