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북방정책에도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다'
신북방정책에도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다'
  • 이진희 기자
  • jhnews@naver.com
  • 승인 2018.11.06 0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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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러시아-일본을 잇는 새 크루즈항로 개척에 이해관계 충돌
부산-중국-러시아 물류시장 확대엔 지자체 협상력 한계 느껴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게 맞다. 국제관계든, 비즈니스 세계든 몇몇이 모여 큰 그림이야 잘 그릴 수 있지만, 디테일로 들어가면 꼭 이해관계가 다른  '악마' 같은 놈이 꼭 등장하기 마련이다. 신북방정책의 바람을 타고 러시아로 나아가려는 지자체들도 의욕(큰 그림)에 못미치는 디테일때문에 고전중이다.

러시아 진출을 꾀하는 지자체는 속초에서 부산에 이르는 동해 연안 도시들이다. 포항시가 7일부터 제1차 한-러지방협력포럼을 야심차게 시작하지만, 그에 앞서 속초 동해 부산 등은 이미 다양한 대러시아 협력방안을 내놓고 추진했거나 추진중이다.

 

강원도 동해시는 이미 동해항~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일본 돗토리 사카이미나토를 운항하는 DBS 크루즈훼리를 운영중이다. 동해시보다 먼저 크루즈선을 도입했던 속초항은 최근 몇년간 숱하게 좌절을 겪어야 했다. 남북한 화해무드를 타고 또다시 속초 ~ 러시아 자루비노 ~ 일본 기타큐슈 노선을 추진중인데, 디테일로 들어가니, 각 나라마다 셈법이 달라 결말이 쉬 날 것 같지 않다.

강원도는 기존의 DBS 크루즈훼리는 동해항을, 새로운 크루즈(갤럭시크루즈)는 속초항을 모항으로 하는 '윈 윈' 전략을 구사중이다. 속초~러시아 자루비노~일본 기타큐슈 항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자루비노항에 CIQ(출입국, 세관, 검역시설)가 없다는 것. 이전 속초~자루비노~블라디보스토크 항로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CIQ가 있기 때문에 취항에 큰 문제가 없었다.

큰 틀에서 합의한 대로 강원도는 최근 러시아 연해주와의 해운협의회에서 자루비로항의 CIQ 확충을 요청했으나, 사실상 거부당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자루비노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 이면에는 중국과 접해 있는 자루비노에 CIQ가 설치될 경우, 갤럭시크루즈로 온 화물과 관광객들이 자루비노에서 육로를 통해 중국 지린성 일대로 유출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숨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도가 내키지는 않지만, 자루비노를 버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경우, 이번에는 일본이 반발한다. 일본 돗토리현은 기존 DBS크루즈의 원활한 운항을 위해 갤럭시크루즈의 블라디보스토크 운항은 안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강원도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DBS크루즈 측의 사업상 불이익 때문이다. 가뜩이나 수익 창출에 어려움을 겪는 판에 기타큐슈~블라디보스토크 노선이 취항하면 운영이 더 어려워진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DBS크루즈는 돗토리현에 대한 운항을 포함해 사업철회까지 고려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돗토리현 입장에서는 유일한 국제 여객항로가 끊길 위기이니 거꾸로 강원도를 압박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서로 돌아가면서 꼬이는 이해관계는 디테일로 들어가야만 확인되는 장면이다. 

부산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부산시가 지난해 10월 의욕을 갖고 추진한 북방경제도시협의회(이하 북방협의회)의 물류 사업이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일부에서는 지난 지방선거로 부산시장이 교체되면서 아예 사업을 포기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 물류사업은 부산을 중심으로 중국의 길림성 등 동북3성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새로운 루트 확보를 위해 출발했지만, 지자체 차원의 협상력이 중국과 러시아에서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 부산을 모항으로, 일본과 러시아를 잇는 환동해권 정기 순환 크루즈선, 즉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강원 속초~부산~일본 가나자와를 잇는 5만7000t급 크루즈선 운항을 내년 4월 시범 실시한다니, 다행이다. 

북방협의회는 그동안 중국 훈춘의 물류를 러시아 자루비노항을 이용해 부산항으로 옮기는 수출입 화물 인센티브 제공 사업과 중국 쑤이펀허의 수출입 화물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부산으로 옮기는 물류 보조금 시범사업을 상대국에게 제안했지만 사실상 거절당했다. 부산이 제2의 도시이지만, 상대국 정부를 상대로 한 지자체의 협상력은 시작부터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물류 사업은 원래 철도 항만 등 국가에서 관리하는 인프라를 활용해야 하는 것인 만큼 정부가 나서는 게 정상이다. 새로운 물류 루트 개척을 위해서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그 인센티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중국과 러시아 정부 차원에서의 도움이 필수다. 그걸 지자체가 하겠다고 나섰으니, 큰 구상은 좋으나 현실의 문턱에 걸렸다고 할 수 있다. 

한때는 물류 대기업 하나를 새 루트 개척에 끌어들이기도 했지만, 중국측의 반발을 샀다고 한다. 당연히 물류 대기업은 두 손을 들었다. 남북화해에 따른 북방진출이 책상 위에서 큰 그림은 쉽게 그릴 수 있지만, 디테일로 들어가면 쉽지 않다는 걸 우리 정부, 지자체, 기업들이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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