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공침범 뒤 러시아의 느긋함에 우리는 뒷북만 친다, 왜?
영공침범 뒤 러시아의 느긋함에 우리는 뒷북만 친다, 왜?
  • 이진희 기자
  • jhnews@naver.com
  • 승인 2019.07.26 0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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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군기의 독도 영공 침범 여파는 25일 사흘째 계속됐다. 서울과 모스크바에서 이날 양국 당국자들간에 후속 협의가 잇따라 이뤄졌고, 서로 밀리지 않으려는 기싸움이 팽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우리측은 서둘러 러시아측으로부터 '유감' 한마디를 얻어낸 뒤 봉합하려는 태도가 역력하고, 러시아측은 '목적 달성한 뒤'에 감지되는 상대적인 느긋함이 엿보인다.

러시아측의 영공 침범 목적은 전문가에 따라 다양하게 제기되지만, 이번 사태에서 러시아가 확실하게 얻은 것은 존재감이다. 동북아 안보지도에서, 또 한반도 분쟁 해결 국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러시아를 각인시킨 것이다. 우리측이 사건의 확대에 따른 분쟁의 증폭보다는 서둘러 봉합하려는 것도 이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밖으로 비치는 우리의 모양새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국방부는 23일 사건 당일날 청사로 초치했던 주한 러시아 무관들을 25일 다시 불렀다. 니콜라이 마르첸코 주한 러시아대사관 공군 무관과 세르게이 발라지기토프 해군 무관이다. 국방부는 양국의 국장급 실무협의로 모양을 갖추려 했지만, 러시아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현지 언론은 24일 한러 국장급 실무협의 자체를 모스크바에서는 어떤 정부부처로부터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꼬집었고, 당일에도 미팅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어느 부처에서도 확인해주지 않는 '비밀협의'라고 썼다.

그렇게 보도하는 심리는 짐작가능하다. 사건 당일이나 25일 한국 국방부가 '부르니 안 갈 도리가 없다'는 러시아 무관의 투덜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게다가 청와대는 러시아의 공식 입장이 전달된지 한참 뒤에 '러시아 무관의 유감표명'을 뒤늦게 발표하는 상황이니 러시아측은 모든 게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날 모스크바에서는 이석배 주러대사가 러시아 외교부로 가 이고르 모르굴로프 차관과 마주 앉았다. 모르굴로프 차관은 이 대사에게 "러시아 군용기는 한국 영공을 침범하지 않았으며 국제 규약을 준수하며 비행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현지 언론은 전했다. 그러면서 군사 분야를 비롯해 양국간 협력 증진의 필요성을 논의했다고 덧붙였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날 만남을 주러 대사관측이 요청한 탓인지, 우리 외무부는 이 대사-모르굴로프 차관의 만남에 대해 별도로 알리지 않았다.

 

                       

위로부터 RT 러시아어판(영공침범 부인), 영어판, 러시아어판(러중 군사훈련)

더욱 안타까운 것은 양국 국장급 실무협의가 끝난 뒤의 양국 분위기다. 국방부는 "실무협의를 통해 러시아 군용기의 우리 영공 침범 사실을 확인해주는 증거자료를 제공하고, 관련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며 "러시아 측은 자료를 진행 중인 조사에 적극 참고할 수 있도록 러시아 국방부에 즉시 송부하겠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러시아 언론은 협의 결과를 무시나 하듯이 일체 다루지 않았다. 비공개 혹은 비밀협의여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러시아측이 막판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태도다.

이럴 경우, 우리 국방부가 언론에 증거 자료를 공개하는 방식으로 상대에게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1월 일본의 해상자위대 초계기의 저공 비행이 문제 되었을 때와 달리 아무런 영상도 공개하지 않았다. 러시아측에 넘기는 증거 자료도 행여 군사비밀이나 우리 자산의 능력 등이 노출될까 우려해 사전에 면밀히 체크하는 작업을 했다. 군사정보보호 협정을 맺고 있는 일본과 러시아는 다르기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 국방부는 일찌감치 관영 매체 RT를 통해 관련 영상을 일부 공개했다. RT는 사건 당일인 23일 오후 2시께(모스크바 시각) '러시아 공군이 중국 공군과 동해에서 합동훈련을 했다'는 기사에 국방부 제공의 관련 영상을 올렸고, 뒤이어 '한국의 영공침범 주장을 부인했다' 기사에도 같은 동영상을 첨부했다.

위로부터 RT 러시아어판, 영어판, 러시아어판 기사

국내 언론은 이 영상을 이틀이나 지난 25일 RT 영문판에서 발견하고 '우리 전투기 2대가 러시아 폭격기에 근접 경계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고 뒤늦게 호들갑을 떨었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러시아는 우리 측이 제공한 증거영상을 검토한 뒤 어떤 태도를 취할까? 무시할 것이다. '존재감 과시'라는 1차 목적을 달성한 만큼, 우리 측에 반박자료를 제시해가며 갈등을 확산시킬 이유가 없다. 우리 역시 그 길을 바라고 있다고 봐야 한다. '유감 표명'을 기대하기에는 우리 정부의 초기 대응이 너무 어설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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