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배구계의 눈찢기 세리모니, '이제 시작'이라는 게 문제다
러시아 배구계의 눈찢기 세리모니, '이제 시작'이라는 게 문제다
  • 나타샤 기자
  • buyrussia2@gmail.com
  • 승인 2019.08.12 0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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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남녀배구가 내년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남자 배구대표팀은 1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올림픽 예선에서 멕시코와 쿠바, 이란을 차례로 꺾고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러시아 여자 대표팀은 지난 5일 한국과의 경기에서 3대2로 대 역전승을 거두면서 올림픽 출전 직행 티켓을 거머쥔 바 있다.

얀덱스 뉴스캡처

우리에게 지난 5일 대 러시아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경기가 될 것이다. 세트스코어 2대0으로 앞서다가 내리 3세트를 내주면서 역전패했다.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손에 쥐었다가 놓친 셈이다. 러시아 여자배구 대표팀의 수석코치 세르지오 부사토(53)는 그날 승리의 기쁨에 겨워 '눈 찢기' 세리머니로 우리 팀을 두번 죽였다(?). 

'눈 찢기' 동작은 아시아인의 신체적인 특징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인종차별 행위다. 국제축구연맹 등 대부분의 축구단체는 이 행위가 스포츠맨 정신에 어긋난다며 금지조항을 두고 있다. 그러나 국제배구연맹(FIVB)은 어쩐 일인지, 금지 조항을 따로 두지 않고 있다.

러시아 언론도 현지 스포츠 전문 매체 '스포르트24'가 부사토 수석 코치의 부적절한 행위를 고발한 뒤에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여자배구팀이 한국을 극적으로 꺾고 올림픽 진출권을 따냈다는 게 그날의 핵심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스포르트24' 보도를 근거로 러시아 측에 강력히 항의했고, 그제서야 부사토 코치가 '스포르트24'를 통해 마지못해 해명했다. 그리고 9일 또다시 사과했다. 하지만 러시아 배구협회는 이번 일을 부사토 코치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면서도 징계는 하지 않았고, 협회 차원의 공식 사과도 거부했다. 

현지 보도를 보면 러시아측의 입장은 한결같다. "이번 일은 한국 여자배구대표팀에게 기분 좋은 일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부사토 코치가 상대를 모욕한다기 보다는 팀이 기적적으로 도쿄올림픽 진출권을 따냈다는 기쁨과 감정에 휩싸여 한 행동이다. 그 부분에 대해 부사토가 정식으로 사과했다."

다시 말하면, 부사토 코치는 2대0으로 지고 있다가 극적으로 2대3으로 이기자 상대팀을 향해 "용용 죽겠지!"하는 심정으로 '눈찢기' 세레모니를 했다는 것인데, 설사 그렇더라도 스포츠맨 정신에는 분명히 위배된다. 스포츠 경기에서 이긴 팀이 진 팀을 향해 "용용 죽겠지!" 라며 혀를 쑥 내미는 것도 금지해야 하는 판에, 인종차별적 행위까지 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축구 등 다른 인기 종목에서도 여전히 유럽 선수들을 중심으로 인종차별적 행동이 끊이지 않는 것은 '과도기적 현상'으로 본다. 유럽 축구계에서 한동안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의 영입에 대한 논란이 치열했고, 경기중 인종차별적 언행도 적지 않았지만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러시아 스포츠계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프리카 출신 축구 선수의 영입을 둘러싸고 이제사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인종차별에 대한 도덕적 기준도 채 정립되지 않았다. 부사토 코치의 '눈찢기' 세레모니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첫 언론 해명에서 "내 행동이 인종차별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진 것에 놀랐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을 때 삼바 춤을 춘 것과 같은 맥락의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황당한 변명으로 들렸지만, 러시아에서는 먹혔다. 이미 비슷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2017년 세르비아 여자 대표팀이 폴란드를 꺾고 다음 해 일본에서 열리는 선수권 대회 본선 진출을 확정하자 '눈을 찢는' 동작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브라질 올림픽 진출에 삼바 춤을 추듯이, 도쿄 선수권 대회에 진출했으니 '눈을 찢는' 세리모니를 벌였다는 것인데, 황당한 일이다. 부사토 코치의 해석 역시 '도쿄 올림픽 진출'이라는 뜻에서 같은 행위를 했다는 주장이다. 서로간에 인식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해법은 하나뿐이다. 국제배구연맹이 눈찢기 등 인종차별 행위에 대한 금지조항을 넣는 것이다. 그것만이 콧대 높은 유럽인들의 '부족한 인식'을 깨우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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