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위한 변명 - 자체 인터넷망 구축과 독자 위키피디아 편집
러시아를 위한 변명 - 자체 인터넷망 구축과 독자 위키피디아 편집
  • 이진희 기자
  • jhnews@naver.com
  • 승인 2019.11.07 16: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컨텐츠 검열과 표현의 자유 억압이라는 단순 구호에서 벗어나 생각해보니

러시아가 사이버 세상에서 동서를 가르는 '철의 장막'을 확고하게 칠 모양이다. 냉전시절, '철의 장막'으로 인해 미국등 서방권과 소련등 동방권 간에는 통신과 전자기기, 교통수단 등 많은 분야에서 서로 다른 시스템을 개발해 사용했다. 같은 철로지만 그 폭이 달라 열차가 이어 달리지 못했고, TV와 같은 전자제품도 시스템이 달라 방송을 시청하려면 TV를 바꾸든지 방송프로그램을 전환해야 했다.

정보통신혁명으로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인터넷으로 소통이 가능한 세상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러시아는 자체 인터넷 시스템인 '루넷'으로 여차하면 차단막을 칠 태세다. 온라인 전자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도 러시아 독자적으로 만들 것을 푸틴 대통령이 최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이같은 태도를 한마디로 국민을 서방세계와 단절시키려는 '억압정책'이라고 단정할 것은 아니다. 가장 넓은 땅을 갖고 있는 러시아는, 과거에는 국경만 잘 지키면 국가안보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요즘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사이버 세상의 안보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는 사람들이 왠만큼 몰려살고 있으니, 현실이나 사이버 세상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땅덩어리가 큰 러시아는 완전히 다르다. 자칫하면 사이버 세상에게 서방측에 종속되거나, 사이버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차단할 경우, 국가는 멘붕상태에 빠지게 된다.

미국의 일부 정치세력은 '인터넷을 통한 러시아의 대미 정치및 선거 개입 음모'를 막기 위해 인터넷을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판이다. 인터넷이 국제적 규율에 따라 움직이고는 있지만, 미국의 장악력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러시아가 자체 인터넷 '루넷' 설립 명분을 '인터넷이 차단될 경우'를 상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키피디아 백과사전도 미국 주도의 인터넷으로 움직이는 만큼, 인터넷이 차단될 경우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자체 백과사전을 만들어둬야 한다는 주장에 토를 달기는 쉽지 않다. 하긴, 인터넷 세상이 오기전에는 각국이 자기들만의 백과사전을 갖고 활용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인터넷이 끊긴다는 것은 러시아에게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루넷 설립 법안 통과 당시 자물쇠를 건 언론 이미지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자체 인터넷망 '루넷' 구축의 기반이 되는 법안이 최근 발효됐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5월 서명한 법안이다. 이 법안은 국제 인터넷망 접속이 차단될 경우에도 가동되는 자체 도메인네임시스템(DNS)을 세우고, 차단벽을 설치해 사이버 공격을 막는 등 러시아 지역 단독 운영에 문제가 없도록 준비하도록 했다. 

외신은 러시아로의 인터넷망이 차단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러시아 정부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검열하거나, 또 서방측과 단절시키기 위해 '루넷'을 준비한다고 분석한다. 그럴만한 정황도 있다. 러시아 인터넷 업체들은 방송·통신 규제기관인 로스콤나드조르가 공급하는 특별 하드웨어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또 웹 트래픽의 출처를 규명하고 금지된 콘텐츠를 차단할 수 있는 DPI(Deep Packet Inspection) 기술도 이용할 수 있다. 

국제 인권감시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 측은 "러시아 정부가 구체적인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콘텐츠를 검열하거나, 폐쇄된 인터넷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게 가능해졌다"며 "표현의 자유와 자유로운 정보 활용이 위협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거듭 진보하는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 정부가 현재의 인터넷 망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암호화 메신저 '텔레그램'의 서비스를 중단시켰지만, 우회 루트를 통해 여전히 러시아에서 폭넓게 사용된다. 반대로 서방세계가 러시아로의 인터넷망을 차단할 경우, 러시아 새 시스템 루넷은 부족하나마, 사이버 세상이 가동되도록 하는 인프라가 될 것이다. 

인터넷망이 차단될 경우, 위키피디아 접속은 불가능하다. 대안은 러시아의 대백과사전을 전자판으로 만드는 것. 푸틴 대통령도 "위키피디아를 러시아대백과사전의 전자판으로 교체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대백과사전은 러시아과학아카데미(RAS)가 지난 2014년 7년에 걸쳐 완성한 총 36권 분량의 백과사전이다.

위키피디아 러시아어판 

 

독자적인 '위키피디아'를 만들려는 러시아 정부 정책도 분명 문제가 있다. 사용자들이 직접 참여해 내용을 업데이트하는 위키피디아는 러시아에서도 가장 많이 활용된다. 러시아어판에는 현재 150만개 이상의 항목이 등록돼 있다고 한다. 굳이 다른 것으로 바꿀 이유는 없다. 하지만 러시아로서는 위키피디아와는 다른 독자적인 전자 백과사전을 가질 생각도 할 수 있다고 본다. 러시아는 강대국이고, 강대국 마인드를 가진 국가 아닌가? 단순히 국수주의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러시아 정부는 위키피디아와 비슷한 자국판 온라인 백과사전 제작에 향후 3년간 약 17억 루블(약 31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한다. 푸틴 대통령도 “적어도 믿을 만한 정보가 현대적이고 좋은 방식으로 제공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연히 해당 사전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하고 정부의 검열을 확대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