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경제제재가 바꾼 러시아 농축산식품시장, 그리고 '스마트팜' 영농
서방의 경제제재가 바꾼 러시아 농축산식품시장, 그리고 '스마트팜' 영농
  • 이진희 기자
  • jhnews@naver.com
  • 승인 2019.12.01 0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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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간의 '경제제재' 전쟁서 수입대체 정책으로 식료품 자급비율 크게 높여
'스마트팜' 마인드로 젖소 VR 실험 등 '집단농장'이 'ICT 과학영농'으로 변신 중

엊그제 언론에 재미있는 사진이 실렸다.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의 한 농가에서 젖소가 특수 제작된 가상현실(VR) 고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겨울철에도 젖소에게 VR로 여름 햇살 아래 넓게 펼쳐진 들판을 보여주면 우유 생산량이 증가하는지 여부를 측정하는 중이라고 했다.

품질 좋은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젖소에게 특수 조명을 사용하는 일본의 축산 농가나 음악을 틀어주는 미국 미주리주의 선진 농장과 다를 바 없는 '러시아식 과학 영농 실험'이다.

사진출처:러시아농림부

 

이 사진이 서방 전문가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달라진 러시아 영농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넓은 땅을 '집단농장' 방식으로 운영해온 러시아 농업에도 이미 착유 로봇(Milking Robots)이 도입되는 등 '스마트 새 바람'이 불어닥치긴 했지만, 'VR 젖소'라면 ICT와의 융복합 영농이나 다름없다. 대세로 떠오른 '스마트팜' (Smart Farm)이다. 

미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의 '스마트팜' 혹은 '스마트 농업'(Smart Agriculture)은 연간 16%씩 성장하고 있다. 물론 아직 초보단계다. 스마트팜 비중은 겨우 1% 수준에 불과하다. 또 농업 선진국에서는 이미 시행중인 농지 네비게이션 시스템, 농토 샘플링 및 검사, 그린하우스(온실) 스마트 시스템 등의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

유럽 등 선진국의 스마트팜 영농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팜'의 도입은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에 따른 서방의 대러 경제제재가 촉발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서방의 경제제재는 러시아 경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2014년 한해만 경제제재로 러시아를 빠져나간 투자금이 400억 달러(약 44조원)에 달했고, 경제성장 둔화와 실물경기 위축을 불러왔다. 러시아내부의 위기감은 크게 고조됐다. 2018년 기준,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은 러시아 기업(단체)및 개인이 무려 491건에 달했으니 러시아 실물 경제의 고통은 짐작가능하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 경제는 비교적 선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엇보다도 러시아 정부가 경제제재에 따른 위기를 타개하기 대대적으로 펼쳐온 '수입대체 정책'이 러시아의 경제 체질을 일부 바꿔놨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농축산식품 부문이다. '젖소 VR' 사진이 보여주는 그대로다. 그 과정은 절박했다. 러시아는 전세계에서 대표적인 식료품 수입국이었다. 소련 시절 부족한 식품난에 대한 화풀이이라도 하듯, 러시아는 1992년 시장경제 도입과 함께 서방 선진국들로부터 식료품을 대거 수입해 식품 매장을 채웠다.

그렇게 러시아 식료품 시장을 장악한 수입품은 '러-서방 경제제재' 전쟁에서는 양날의 칼이 됐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경제제재에 대한 보복조치로 농축산식품 수입금지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2014년 8월이었다. 하루 아침에 서방의 주요 농축산식품이 수입금지되자 러시아 식품시장에서는 난리가 났다. 서방의 식품업계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같은 양측의 경제보복으로 지난 5년간 러시아는 500억 달러 상당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지만, 서방측은 그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고 러시아측은 주장한다.(서방 전문가들은 EU 240억 달러, 미국 170억 달러, 총 410억 달러의 손실을 본 것으로 분석한다).

훈제 소시지 일종인 '세르블라'를 먹어보라고 권하는 러시아 식품업체 '미라토르그' 홈페이지. 위는  '에따 나샤 스트라나' 홍보 영상.

 

러시아 정부는 기존의 수입 식료품을 대체하기 위해 품질이 크게 떨어지는 남미, 남아프리카 식품시장을 헤매야 했다. 동시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수입식품을 대체하는 농축산부문 진흥 프로젝트에 나섰다.

그 결과, 많은 농축산가공 수입품들이 국내산(러시아산)으로 교체됐다. TV 광고시장에도 국내 브랜드가 등장했다. 러시아 최대 육류가공업체 '미라토르그'는 얼마 전까지 "우리 땅에서 난 것이 가장 좋다"는 러시아판 '신토불이' 광고(에따 나샤 스트라나 - 이게 우리나라)를 대대적으로 방영하기도 했다. 

드미트리 릴코 농업시장 연구소장은 러시아투데이(RT)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앞으로 몇 년 동안 농축산식품의 수입시장이 아닐 것"이라며 "국내 업체들이 이미 저렴하게 생산하는 법을 배웠거나, 대체 상품을 내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비록 품질은 수입품에 비해 떨어지지만, 국내산(러시아산) 농축산품 생산이 30% 이상 늘어나고 농축산및 가공식품의 품목도 다양해졌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식품 산업이 서방의 대러 제재에 따른 최대 수혜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대형마트(위)와 식품매장. 미국등 서방 수입품을 대체하는 한국산 식품들/바이러 자료사진

 

러시아 농림부에 따르면, 러시아 식품 수입은 2013년 433억 달러(50조원)에서 2018년 298억 달러(34조4,000억원)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국내 농식품 생산액은 63조6,000억원에서 90조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수입품이 줄어드니, 소비자들은 울며겨자 먹기로 국내산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 '맥도널드'도 다른 대안이 없었다. 버거 등 음식 재료의 98%를 러시아 국내산으로 돌렸다. 맥도널드는 앞으로 2년 내에 '100% 러시아산 재료'를 사용할 계획이다.

러시아 정부의 농식품분야 수입대체 정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지난해 수립한 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2018~2020년 3년간 2,420억 루블(4조4000억원) 보조금을 농식품 업체들에게 뿌릴 예정이다. 러시아 올리가르히 재벌그룹 '레노바'가 140억 루블(2,500억원)을 투자해 대규모 농장 건설에 나서기로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그 폐해도 적지 않다. 국내산 식품 장려정책은 지금까지도 소비자들에게 '출혈'을 강요하고 있다. 수입금지 조치로 절대 공급량이 줄어들면서, 가격은 꾸준히 상승했고, 품질도 아직은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버터 가격은 무려 79%, 생선류는 68%, 양배추 등 채소류는 62% 올랐다는 보고서도 나온 바 있다. 러시아 국립경제 아카데미의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 소비자의 피해액은 연간 4,450억 루블(8조1,000억원)에 달한다고 했다. 

러시아의 '스마트팜'은 서방의 경제제재와 그에 대한 보복조치 등에 의한 국민 전체의 '출혈'을 바탕으로 시작됐고,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뼈를 깎는 아픔' 없이는 체질 개선도, 스마트한 성장도 없다는 '가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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