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전쟁'에서 기선을 놓치지 않는 푸틴, 전략적 대응 뒤엔..
'석유 전쟁'에서 기선을 놓치지 않는 푸틴, 전략적 대응 뒤엔..
  • 이진희 기자
  • jhnews@naver.com
  • 승인 2020.04.05 0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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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 증산 경쟁 촉발한 러시아, 트럼프 미 대통령 전화요청에 슬쩍 '후퇴 행보'
명분 빼앗긴 사우디, 험한 반발 - 6일로 예정된 OPEC+ 회의도 험난해 보인다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간의 '석유 전쟁'이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국제유가는 원래 중동 산유국과 러시아에게 '아킬레스 건'이었는데, 신종 코로나(COVID) 사태가 터지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도 정치 생명을 위협하는 '칼'로 변한 모양새다. '저 유가가 미 국민들에게 좋다'고 해온 그도 국제유가가 끝없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사우디아라이바와 러시아에 잇따라 전화를 돌리는 이유다. 

전화를 받는 쪽의 태도를 정리하면 사우디는 '요지부동', 러시아는 '전략적인 대응'이다. 그래서 기선잡기에 성공한 측은 푸틴 대통령이다. OPEC+(OPEC과 10개 주요 산유국의 연대체) 감산회의에서 추가 감산 제의를 거부하고 4월부터 감산 이전 상태로 돌아가겠다며 상대를 '전쟁'으로 끌어들인 것도,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 요청에 못 이기는 척 다시 감산하자며 휴전을 제안한 것도 푸틴 대통령이다.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섣불리 '증산 전쟁'을 선포했다가 후퇴하기가 민망한 형국에 빠져든 듯하다.

트럼프 대통령도 자칫하면 체면을 완전히 구길 판이다.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뒤 '감산할 것'이라는 트윗을 즉각 날렸는데, 빠른 시일내에 실현되지 않으면 전세계 경제주체들이 더이상 '유가 전쟁'에 관한 한 '트럼프의 트윗'을 신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푸틴, 석유 감산 의지 표명/얀덱스 캡처

푸틴 대통령의 전략적(?) 태도로 '협상의 판'은 깔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전쟁을 끝내려면 '명분'이 필요한데, 서로 유리한 '명분'을 찾으려다 보니, 설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사우디는 4일 국영 SPA통신을 통해 '러시아 대통령실의 발표는 진실을 왜곡했다'라는 성명을 냈다. 러시아측 발표란 푸틴 대통령의 전날 발언이다. 그는 에너지 관련 부처및 기업들과 화상회의를 주재하면서 "(지난달 6일) OPEC+의 감산 합의를 결렬시킨 쪽은 러시아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사우디가 OPEC+ 합의에서 탈퇴해 산유량을 늘리고 유가를 할인한 것은 셰일오일을 생산하는 경쟁자들(미국)을 따돌리려는 시도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사우디가 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우디 성명은 이에 대한 반박이다. "그 (감산) 합의를 거부한 쪽은 러시아였다. 사우디와 나머지 22개 산유국은 감산 합의를 연장하고 더 감산하자고 러시아를 설득했다"라고 주장한 게 핵심이다. 특히 '사우디가 미국의 셰일오일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거짓말'이라고 부인했다.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 압둘아지즈 빈 살만 왕자도 "언론에다 '협상에 참여한 모든 산유국이 4월부터 감산 의무에서 벗어난다'고 처음 말했던 장본인이 러시아 에너지부 장관"이라며 "우리는 저유가와 손해를 메우려고 증산한 것뿐"이라고 강조했지만, 뒤늦게 '전략적 싸움'에서 졌다는 사실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러시아 원유 저장고, 감산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달반 혹은 두달사이에 저장고 여유가 없을 것으로 우려된다/러시아 TV 캡처 

사실 미국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측은 러시아다. 가뜩이나 미국 셰일가스유전업체의 성장이 두려운데, 러시아에서 독일로 가는 가스관 '노르트가스 2'의 건설마저도 '참여기업 제재' 운운하면서 방해하니 울화통이 치밀 일이다. 제대로 타이밍을 잡아 미국 셰일가스유전 업체에 세게 한방 먹였다.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신종 코로나 감염이 확산하면서 한달간 '국가적 휴무'를 선포해야 할만큼 다급해졌다. 저 유가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재정이 바닥날 게 뻔하다. 휴전 제안 타이밍을 두고 고민할 즈음, 성격 급한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 에너지 기업 CEO들과 회의에서 '조정자 역활을 맡겠다"고 큰소리쳤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1천만∼1천500만 배럴 감산 제안에 대해 "OPEC+ 틀 내에서 다른 산유국과 합의할 준비가 됐고, 미국과도 기꺼이 협력하겠다"라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이번 석유 전쟁의 책임을 사우디로 떠넘겼다. 

러시아 언론은 OPEC+회의가 6일에서 9일로 미뤄졌다고 보도했다/얀덱스 캡처 

뒤이어 OPEC 14개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회원 10개 산유국이 오는 6일 긴급 화상회의를 열어 국제 유가 안정을 논의할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리고 또 회의 연기 소식이 전해졌다. '석유 전쟁'의 앙금이 남아 있는 데다가 화상회의를 앞두고 진행된 개별 국가간 사전 조율이 험난했다는 뜻이다. 외신들이 보도하는 8~9일 개최설이라도 실현되면 진짜 다행이다. 러시아 언론은 9일 개최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OPEC+ 회의는 8~9일에도 열리지 않는다면, 회의 일정 잡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섣불리 회의를 열었다가 감산 합의에 실패라도 하면, 간신히 떠받쳐놓은 유가는 실망감에 배럴당 10달러, 아니 한자리수로 폭락할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가 원하는 목표는 분명하다. 푸틴 대통령이 제시한 '유가 배럴당 40달러' 다. 신종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상황에서 그 선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러시아 석유업체 대표들과 화상회의 중인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보박 러시아에너지부 장관은 "신종 코로나 사태로 현재 하루 약 1천만~1천500만 배럴의 수요 감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향후 몇주 안에 1천500만~2천만 배럴까지 수요가 감소할 수 있다"며 "한달 반이나 두달 뒤에는 잉여 석유를 채울 저장소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모든 게 다 사우디측의 무한정 생산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늬앙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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