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3인방'이 몰고온 벨라루스 대선 돌풍 - 아직은 찻잔속 태풍?
'여성 3인방'이 몰고온 벨라루스 대선 돌풍 - 아직은 찻잔속 태풍?
  • 이진희 기자
  • jhnews@naver.com
  • 승인 2020.08.03 0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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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후보 거부당한 야권 후보 3명의 지지자들 단일화 - 곳곳서 수만명 동원
집권 26년째 루카센코 대통령 당선은 거의 확실 - 견고한 집권세력에 금가

구소련의 벨라루스 대통령 선거가 1주일(8월 9일) 앞으로 다가왔다. 1994년부터 26년째 집권중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65) 대통령의 당선이 거의 확정적이다. 지난 5차례 대선에서 매번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됐으니, 벨라루스 대선은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야권의 바람몰이로 굳건한 집권세력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젊은이들이 앞장선 '정권 교체' 외침도 벨라루시 국민들의 정치 의식을 새롭게 일깨우고 있다. 선거 판이 열릴 때만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다.

유럽의 마지막 남은 독재자라는 소리는 듣는 루카셴코 대통령이 유력한 야권 후보를 낙마시키는 수법도 과거와 다를 바 없었다. 군소 후보들을 뒤에 달고 앞장서 달리는 '1인 경주'로 끝날 것 같았다. 그렇게 벨라루스 '대선 2020'도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벨라루스 브레스트에서 열린 대선후보 집회. 야권 스베틀라나 후보 지지자 1만5천여명이 보였다./얀덱스 캡처
체초된 남편을 대신해 출마한 스베틀라나 티호노프스카야 후보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한 것은 신종 코로라(COVID 19)에 대한 집권세력의 대처 실패로 보인다. '보드카를 마시고 사우나 하면 (독감처럼) 코로나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다'는 식으로 신종 코로나의 위험을 무시하는 '루카셴코식' 방역 조치에 막연한 불안감이 사회 전반에 깔렸고, 경제적 어려움은 그 불안감을 정권에 대한 불신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집권세력이 대선에서 대항마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려고 한 무리수는 오히려 야권을 결집시키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루카센코 대통령의 눈을 거슬리게 하는 야권 후보는 '벨라루스판 나발리'로 불리는 유명 블로거 세르게이 티호노프스키와 금융 재벌 출신의 빅토르 바바리코, '벨라루스판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첨단기술파크의 창설자이자 외교관 출신인 발레리 체프칼로 등 3명이었다고 한다.

어차피 고만고만한 야권후보 3명이 각개 약진하는 상황에서 루카센코 측이 위협을 느낄 일은 없었다. 루카센코 후보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약점. 무리수를 둔 건 그래서였다.

집권세력은 지난 5월 티호노프스키를 사회질서 교란혐의로, 바바리코는 돈세탁과 탈세혐의 등으로 전격 체포했다. 또 대선출마 지지 인명부가 위조됐다는 이유로 체프칼로의 대선 후보 등록을 거부했고, 위협을 느낀 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러시아로 도피했다. 

벨라루스 중앙선관위는 지난달 14일 대선 후보 등록을 마감하면서 루카셴코 대통령을 포함한 5명의 후보가 공식 등록됐다고 발표했다. 유력인사 3명을 뺀 후보자 면면을 보면 그에게 대적할 만한 후보는 아예 없었다. 

입후보를 거부당한 야권 후보 3명의 아내, 선대본부장 출신의 '여성 3인방'이 벨라루스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사진출처:vK 
야권후보 지지및 반정부 집회에 참석한 민스크 시민들. 무려 6만명이 모였다는 보도도 나왔다/사진:집회 동영상 캡처 

그러나 '정치는 살아움직이는 생명'이라는 말을 입증이나 하듯, 이변이 나타났다. 체포된 티호노프스키의 아내인 스베틀라나(38)가 남편을 대신해 후보 등록을 마쳤는데,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달 30일 민스크, 지난 2일 브레스트에서 열린 대선 유세겸 반정부 집회에 수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입후보가 무산된 다른 2명의 야권 인사, 즉 바바리코와 체프칼로 진영의 지지자들이 대거 참가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바람은 다른 두 야권세력을 상징하는 여성들이 스베틀라나 (티호노프스카야)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면서 예상된 것인지도 모른다. 바바리코 진영의 여성 선대 본부장 출신 마리아 콜레스니코바와 체프칼로 후보의 아내 베로니카가 후보 등록이 끝나자 마자 스베틀라나 후보와 손을 맞잡았다. 마리아 콜레스니코바는 “우리 세 사람이 만나야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야권 후보의 단일화에 만족해했다.

단일화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며칠 후인 19일 수도 민스크의 '우호공원'에서 열린 대선 유세를 겸한 반정부 집회에 무려 7천여명이 모여 '스베틀라나'를 외쳤다. 스베틀라나 후보는 유세에서 “나도 처음에는 두려웠다. 이 정부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은 두렵지 않다”며 "함께 용기를 내자"고 했다.

30일 열린 민스크 집회에는 최대 6만명이 모였다고 했다. 이날 시위는 옛 소련 국가에서 벌어진 반 정부 시위로는 최근 10년 사이 최대 규모라고 외신은 평가했다. 러시아 언론은 최대 3만4천여명으로 집계했다.

현장 분위기는 더욱 뜨거웠다. 스베틀라나 후보가 "권력 교체를 이뤄내자"고 외치자 시위대가 박수를 치고,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루카센코 대통령이 "대통령직은 여성이 맡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라고 깎아내렸지만, 그녀의 지지는 계속 올라가는 중이다. 

현지 정치 해설가 아르티옴 슈라이브만은 "당국의 강경한 탄압에도 대중이 공공연하게 루카센코 체체에 반기를 들고 시위가 확산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평가하면서 "경제 침체와 신종 코로나 대처 등에서 집권세력이 점수를 많이 잃은 결과"라고 분석했다.

밑바닥 민심을 훑는 스베틀라나 후보팀과는 반대로, 루카센코 대통령은 연일 폭동 진압에 동원되는 보안군의 훈련을 참관하고 격려하거나, 나라의 안정을 해치려는 외국들의 기도를 규탄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스베틀라나 후보의 대규모 유세를 사회적 질서 교란으로 몰고 가려는 것. 때맞춰 러시아 용병 집단 '바그너' 소속 요원 33명을 쿠데타 기도로 전격 체포하는 등 러시아를 등에 업은 '대중 소요' 음모로 연결시키고 있다.

물론 대타로 나온 스베틀라나 후보에게 특별한 집권 프로그램은 없다, 그녀는 루카셴코 대통령을 일단 몰아낸 뒤 공정한 선거 일정을 발표하고, 정치범들을 모두 풀어준 상태에서 선거를 다시 치르자는 게 전부다. 그녀는 한 집회 도중 '국가를 위해 계속 일해달라'고 외치는 남성들을 향해 “내 임무만 완수하면 조용히 물러나겠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스베틀라나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외신은 그녀의 돌풍을 '루카셴코 대통령의 비현실적인 인식과 그의 독재적 권력에 금이 가는 계기로 기억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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