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시위에도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정권이 끄떡하지 않는 까닭?
대규모 시위에도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정권이 끄떡하지 않는 까닭?
  • 이진희 기자
  • jhnews@naver.com
  • 승인 2020.08.29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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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 경찰, 시위대 주도세력과 파업 지도자들 다시 검거에 나서 - 공세전환
야권 시위대, 대규모 평화적 시위외에 다른 대안없어 - 유혈 충돌 가능성도 낮아

집권세력과 야권 시위대간에 팽팽한 대치를 계속해온 벨라루스의 시위 정국이 루카센코 대통령측이 다시 공세적으로 나서면서 '주말 대파란'을 예고하고 있다.

벨라루스 치안당국은 27, 28일 독립광장에서 '대통령 퇴진' 시위를 벌이는 시위대를 분리시킨 뒤 주도급 인사 수십명을 체포, 연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위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주차된 트럭 등 특수차량에 시위 가담자들이 오르는 모습들이 언론에 포착됐다.

민스크 독립광장에서 오몬의 시위대 체포가 시작됐다/얀덱스 캡처
속보-민스크에서 시위대 체포가 시작됐다는 자막이 떠 있다
연행된 시위가담자들이 경찰 특수차량에 오르고 있다/러시아 매체 동영상 캡처
여성들이 참여한 민스크 시위대 체포가 시작됐다/얀덱스 캡처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은 28일 "벨라루스 경찰이 시위 첫 주, 시위대를 가혹하게 진압하고 폭력적으로 연행하다 시민들의 거센 항의에 직면하자 최근 열흘 이상 시위대의 움직임을 그냥 지켜봐 오더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며 "당국은 시위 주도세력과 국영기업의 파업위원회 멤버들을 체포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실제로 벨라루스 특수진압병력 오몬(OMON)은 지난 이틀동안 독립광장 등 시내 곳곳의 시위 현장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핵심 시위대를 주변 시민들과 분리한 뒤, 대기중인 차량으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와 같은 무지비한 폭력 사용은 없었다고 한다.

이는 대선 직후 시위 초기의 민심 이반이 선량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경찰당국의 폭력에 대한 '반발심'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의식해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수십만명이 운집한 벨라루스 시위. 영웅의 도시 오벨리스크 광장 모습/러시아 언론 동영상 캡처

안타까운 것은 벨라루스 당국의 공세에 야권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두어차례 민심을 보여준 20만명 이상의 대규모 시위를 재조직하고, 총파업과 연대해 루카셴코 대통령을 계속 압박하거나, 국제사회의 물리적인 지원을 얻어내는 것 외에 뾰적한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두가지 방법이 루카셴코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직접적인 무기가 될 것이냐? 불행하게도 아니다. 지난 주말의 대규모 시위로 되돌아 가보자.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최대 위기감을 안겨준 지난 주말, 일부 시위대는 대통령궁 앞으로 몰려갔다. 당시 루카셴코 대통령도 무장한 경호병력과 함께 헬기에 올라 시위 상황을 살펴본 뒤, 기관총을 손에 들고 경비병들을 격려하는 등 위기 의식을 드러냈다. 

기관단총을 들고 관저 경비병들과 악수를 나누는 루카셴코 대통령/러시아 언론 동영상 캡처

그러나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 앞에서 한동안 관저를 지키는 '오몬' 대원들과 대치했지만, '(루카셴코는) 물러나라'는 구호만 외친 뒤 별다른 충돌 없이 시내 중심가로 물러났다. 벨라루스의 이번 시위가 얼마나 평화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거꾸로 해석하면, 벨라루스의 현 시위대는 권력을 무너뜨릴 의지가 비교적 부족한, 구조적 약점을 지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유혈충돌(마가단 사태)을 일으켜 대통령을 쫓아낸 우크라이나 친서방 시위대나, 2018년 아르메니아의 조기 총선을 이끌어낸 반체제 시위대와는 그 출발부터 달라 보인다. 벨라루스의 대규모 시위는 평화적인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와 고무탄, 최루탄 등을 사용하는 '폭력적인 경찰'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벨라루스 여성들이 폭력 진압을 자제해달라며 진압경찰에게 몰려가 허그(포옹)하는 장면/러시아 언론 캡처

루카셴코 측의 강경대처에 야권이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29, 30일 주말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규모가 시위 정국의 앞날을 가름하는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시위를 이끌 핵심인사의 존재다.

지난 대선에서 루카셴코 대통령에 도전했던 여성 야권 대선후보 스베틀라나 티하노프스카야(37)가 이번 시위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지만, 실질적 지도자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이미 이웃 국가인 리투아니아로 쫓겨간 상태다. 지금이라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시위를 주도한다면 모르겠으나, 그럴 생각은 없는 듯하다. 더욱이 그녀는 "재선거가 이뤄지더라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권력욕 자체가 없는 것이다.

여성 야권 지도자 티하노프스키 대선후보/사진출처:프라우다.ru

대신, 그녀는 사회 각계 대표 수십명으로 '권력 이양을 위한 조정협의회'를 출범시켰다. 또 최고 결정기관으로 (조정협의회의) '7인 간부회' 도 구성했지만, 벨라루스 당국의 강한 압박에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 벨라루스 당국은 '7인 간부회' 멤버이자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시작으로 '7인 간부회'에 대한 소환 조사에 들어간 상태다. 

서방측의 지원도 아직까지는 말에 그치고 있다. 티하노프스카야가 25일 화상을 통해 유럽의회 외교위원회 비상회의에 참석, "벨라루스에선 현재 민주적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러시아가 버티고 있는 한, 서방이 벨라루스에 직접 개입할 가능성은 낮다. 유럽연합(EU)이 27일 루카셴코 대통령 측 인사 20여명에 대해 제재하기로 합의했지만, 제제 실효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리투아니아인 5만여명이 빌뉴스에서 벨라루스 국경까지 32km 길이의 인간사슬을 만들어 벨라루스 야권 시위에 지지를 표시했지만, 이벤트에 불과하다.  

반면 루카셴코 대통령 측은 아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서부 국경에 추가 병력을 배치하고 훈련에 돌입하는 등 안보위기를 조성하고,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외부 위협이 발생할 경우 '개입 약속'(?)까지 받아냈다. 푸틴 대통령은 루카셴코 대통령의 요청이 있을 경우, 벨라루스 사태에 개입할 예비병력을 구성했다고 강조했다.

루카셴코, 야권의 '정권이양 조정 협의체'를 권력 찬탈의도로 규정. '협의체'의 간부회 멤버들을 소환 조사하는 이유다./얀덱스 캡처

또 신종 코로나(COVID 19) 사태와 일부 대기업 파업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10억 달러를 재융자받기로 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28일 주요 기업들을 순회하면서 "사태는 안정되고 있다"며 "이제는 경제에 신경쓸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야권과의 대화 의지를 거듭 피력했다. 권력 분점을 겨냥한 헌법개정 논의에 언제든지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분명하다. 개헌을 통한 정상적인 재집권이다. 푸틴 대통령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로 호되게 당했던 2011년 말~2012년 초의 '정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푸틴 총리는 시위대의 불만을 상당부분 해소하는 정치개혁을 추진한 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벨라루스 시위 사태는 이미 20일을 넘겼지만, 정국 향방을 정확히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루카셴코 측에 점차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간다면, '2011년 푸틴식 정치위기'의 재판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의 CIS 연구소 블라디미르 좌리힌 부소장이 "루카셴코가 의회와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는 약속을 이행하고, 대통령의 권한 일부를 정부에 이전한다면 국민의 불만 상당 부분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 이유다. 

루카센코 대통령이 가장 믿는 구석은 역시 러시아와 자신에게 충성하는 권력기관이다. 친서방, 친러시아로 갈라졌던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와는 다른 상황이다. 

벨라루스군 총참모장(참모총장) 알렉산드르 볼포비치는 지난 25일 "현재의 복잡한 정세에서 군은 국가와 사회, 평화롭게 살고 일하기를 원하는 시민을 지키기 위한 군사안보를 보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빅토르 흐레닌 국방장관은 "시위대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비 등을 파손하는 등 선을 넘어선다면 경찰이 아니라 군대와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경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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