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동포 러시아 이주 30년 연재 ‘모스크바 한국인’ 1 - 박복환 사장
한국인 동포 러시아 이주 30년 연재 ‘모스크바 한국인’ 1 - 박복환 사장
  • 최승현 기자
  • llpostino.ru@gmail.com
  • 승인 2021.04.29 0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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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수레바퀴에 오르다 - 박복환(1)

50대 초 눈 시술 위해 모스크바 행 티켓 끊은 게 인연
모스크바에 한식 레스토랑· 스크린 골프 최초 개업해
98년 체르키좁스키 시장 내 100개 한국인 상가 건축

한국인 동포 러시아 이주(모스크바 정착) 30주년을 맞았다. 1990년 한국과 러시아(당시 소련)는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이듬해 한국인들의 러시아 모스크바 이주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선교사를 비롯해 기업·단체 주재원, 유학생, 소상공인이 주를 이뤘다. 

모스크바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문화와 언어가 다른 낯선 환경 속에서 꾸준히 앞날을 개척해왔다. 1997년 IMF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4년 대러 경제 재재 이후 코로나 19 상황까지, 이들은 러시아인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고려인 및 사할린 동포(소련 시절 이주)를 중심으로 한 재려시아 한인사는 그동안 러시아 및 고려인 학자, 한국의 러시아 전공자 등에 의해 연구되고, 기록됐으나 한러 수교이후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의 경우,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다. 이에 바이러시아(buyrussia21.com)은 그들의 발자취를 수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1, 운명의 수레바퀴에 오르다 - 박복환 사장

91년 7월 눈 수술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에 온 박복환 씨는 93년 한인 최초로 모스크바에 한식 레스토랑인 한국관을 개업했다.
91년 7월 눈 수술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에 온 박복환 씨는 93년 한인 최초로 모스크바에 한식 레스토랑인 한국관을 개업했다. 

<아리랑>, <신라>와 더불어 93년 문을 연 <한국관>은 모스크바 한식업계에서 전설로 통한다. 모스크바에 소재한 한식 레스토랑은 현재까지도 교민들이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사랑채로 한인 야사(野史)는 대부분 이곳에서 쓰인다. 

박복환(82세)<사진>은 91년 7월 눈 수술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다. 당시 안과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전문의는 니콜라이 표도로프 박사였다. 운명이었을까. 시술 이후 그의 시야는 이미 한반도가 아닌 광활한 대륙을 향하고 있었다.

애초 그의 목표는 요식업이 아닌 한국 전자 제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백화점 건립이었다. 난항이 예상됐다. 이후 주변 지인들의 권유로 식당 개업에 뜻을 뒀다. 20년 간 한국서 사업체를 이끌었던 그에게 모스크바는 기회의 땅이었다. 2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93년 4월 12일 <한국관>을 개업했다. 당시 코리아 음식점은 구소련 시절에 문을 연 북한식당 <평양>과 <오작교>가 유일했다. 

“식당 못 열어서 난리일 때였어요. 러시아 정·재계 고위급 인사들도 갈 때가 없었던 시절이었죠. 일반인들이야 오죽했겠어요, 한국에서는 개방 이후 관광객이 물밀 듯이 밀려올 때였죠. 노다지인 게 뻔히 보여요. 그런데 식당 허가를 받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에요. 한국서도 그렇고 러시아에서도 절차가 무척 까다로웠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외국환거래 심사에서 계속 탈락하고, 결과적으로는 비합법적으로 자금을 들여왔어요. 100만 불(달러)이었는데 한 달에 네다섯 번 한국을 오고 가며 제가 가지고 오기도 하고, 아는 사람 통해 나눠 가져오고, 심지어 레스토랑 리모델링 업체 직원 통해서 돈을 들여왔죠. 그때는 그랬어요. 그냥 현금다발을 뭉치로 들고 왔다 갔다 했죠.(웃음) 러시아는 또 어쨌게요. 말도 마요. 시장경제로 전환할 때였는데 계약을 체결할 관리 주체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식당 자리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거죠. 러시아 관가에 아는 사람이 꽤 있었는데, 빅토르 체르나무르진 전 총리 주선으로 볼고그라드스키 26번지 출판사 건물을 임대할 수 있게 되었죠.”

체르나무르진 전 러시아 총리는 구소련 붕괴 후 최장수 총리를 역임한 인물로 푸틴 정권의 실세였다. 그는 체르나무르진에 도움을 요청했고 총리 명의의 서신 덕분에 한국관을 개업할 수 있었다.
체르나무르진 전 러시아 총리는 구소련 붕괴 후 최장수 총리를 역임한 인물로 옐친 정권의 실세였다. 그는 체르나무르진에 도움을 요청했고 총리 명의의 서신 덕분에 한국관을 개업할 수 있었다.

체르나무르진 전 러시아 총리는 구소련 붕괴 후 최장수 총리를 역임한 인물로 옐친 정권의 실세였다. 그는 체르나무르진에 도움을 요청했고 총리 명의의 서신이 출판사에 도착한 후에서야 계약이 성사됐다. 그로부터 1년간의 리모델링 작업 끝에 <한국관>을 개업했다. 이후 <한국관>은 대사관과 지상사의 굵직한 만찬 행사는 물론 고려인들과 현지인, 한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으로 성장했다.

“당시 종업원들만 100명이 넘었어요. 2,700스퀘어(㎡)에 방이 5개였는데 한꺼번에 500명을 홀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죠. 하루에 6,000명의 손님을 받은 적도 있어요. 어쨌든 운영의 밑천은 한국에서의 사업 경험이라 봐야죠.” 

그는 러시아로 오기 전 인천시 남구 주안동에서 음향기기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인천 전자’를 운영했다. 업종별 판매 순위 3위로 110명의 직원에 직영점 13개를 보유한 연매출 110억 원 규모의 중견업체 사장이었다. 

“아남, 인켈, 롯데 등 국산 오디오를 주로 팔았는데 그때가 이미 사양길로 접어들 때였어요. 조카에게 물려주고 새로운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을 때 모스크바에 왔습니다. 장사해서 큰 돈을 모았어요. 한국에 IMF 광풍이 불었고,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 전 까지요.” 

박복환은 <한국관>을 운영해 번 자금으로 15만 평 규모의 모스크바 체르키좁스키 도매시장 내 중앙 센터에 컨테이너 형 상가 5백 개 규모의 한인 상가를 구축했다. 체르키좁스키 시장은 모스크바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약 7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생필품을 주로 판매하는 도매시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주로 외국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시장이 형성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당시 하루 유동 인구가 50만~70만 명이나 됐다. 러시아 외에도 인근 우크라이나와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업자들이 매일 500여 대의 차량으로 물건을 실어 오는 등 신흥시장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었다. 러시아, 유라시아 상인 뿐 아니라 베트남과 중국 상인, 한국의 보따리상들이 활동한 본거지이기도 했다.

한인 상가 공사를 마무리 한 후 1998년 7월 입주자를 모집하기 위해 한국에서 분양 설명회를 가졌다. 컨테이너 상가는 약 4평 크기로 당시 책정 분양가는 1만 달러였다. 그는 이곳이 ‘코리아 타운’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했다. 한국의 보따리상은 물론, 당시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자영업자, 소상공인, 중소 기업인이 러시아 시장에 진출해 마음 놓고 장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9월 15일로 잡아놓은 입주 예정일을 한 달 남짓 남겨둔 1998년 8월 17일 러시아가 (한국의 IMF 외환위기와 같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다.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죠. 하루 아침에 공든 탑이 무너졌어요. 500개 상가 중에 15개 정도만 임대가 나갔어요. 그것도 분양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넘겨버렸어요. '운명이겠거니' 하고 스스로 달랬죠. 당시 500 만 불을 투자했거든요. 그때는 눈에 보였어요. 500만 불을 투자하면 5천만 불이 될 거라 믿었죠. 돈에 큰 욕심을 가진 적은 없는데, 자기 시험 같은 거였어요. 배팅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모라토리엄 터지기 전후 한국에 간 사람들은 다들 돈 벌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돌아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한데 운명이죠 뭐. 남들 같았으면 화병 나서 못 살았을텐데 저는 뭐,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습니다.”

모라토리엄 이후 사세는 기울었다. <한국관> 운영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 골프 시뮬레이터(Golf Simulator)가 있었다. 

1990년대 후반 박세리가 해외진출 6개월 만에 LPGA US오픈에서 우승하면서 골프에 대한 관심이 확산하던 시기였다. 골프 인구는 지속해서 늘었고 골프장의 비싼 비용, 시공간적인 제약 등이 맞물리면서 필드 라운드에 대한 욕구를 해소해 줄 수 있는 골프 시뮬레이션 시스템이 골프 연습장 등을 통해 빠른 속도로 확산했다. 

그는 골프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내다보고 식당 2층에 있던 극장을 개조해 스크린 골프장을 차렸고 몇 차례 장소를 옮기면서 20년 넘게 <골프 프라자>를 운영하고 있다. 가게(한국관)는 아는 지인에게 넘겼다.

“쉰 살에 골프를 배워서 6개월 만에 대표 선수가 됐어요. 30년 간 테니스를 쳤는데, 골프는 성격이 매우 다른 운동이죠. 테니스는 상대와의 대결이지만 골프는 자신과의 투쟁이거든요. 골프장 운영하면서도 많은 일이 있었죠. 당시에 LG와 삼성의 직원이 합해서 150명은 됐거든요. 두 회사를 위한 연습장을 따로 설치해주면 1인 당 연회비 2천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했죠. 품위서 작성을 한 일주일 남겨두고 IMF로 대기업이 어려움에 처했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어요.”

이전한 골프장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해 큰 재산 피해를 입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골프 스크린 '한국관'을 운영중인 박복환 씨는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한국 프로 골퍼다.
골프 스크린 '한국관'을 운영중인 박복환 씨는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한국 프로 골퍼다.

유통업에 손을 댄 적도 있다. 한국관을 접고 프룬젠스키 강변 14번지(현 백학 레스토랑) 건물을 매입했다. 종합 상사를 설립할 요량으로 대기업을 통해 몇 컨테이너 불량의 한국 물품을 수입했다. 그런데, 대부분이 하자 있는 물건이었다. 10~15%의 물건을 제외하고는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서에는 제품 하자 보증을 요청하고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었지만 안 그랬어요. 소유했던 건물도 려시아 경제 위기 때 직원 명의로 바꿔줬죠." 

1997년 IMF 외환 위기로 한국 경제가 곤두박칠할 때는 사비를 들여 대한항공 전세기편을 띄웠다. 150명씩 2차례에 걸쳐 현지인 ‘모국 상품 구매단’을 파견해 외화 수혈을 돕기도 했다.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 10번 타로 카드명이다. 인생이란 서커스와 같은 곡예의 연속.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생의 파란곡절과 인생 유전이 떠올랐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할 운명을 지닌 10번 카드처럼 행운과 불운이 무작위로 뒤섞인 운명은 우리 삶 속에서 늘 회전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일제 해방과 한국전쟁, 군사 독재와 민주화,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경제 성장, 그리고 이국 생활, 한국의 현대사를 몸소 체득한 사람입니다. 유년 시절에는 끼니를 거를 때가 부지기수였어요. 그때는 보리죽 먹기도 힘들었지요. 지금은 밥은 먹고 삽니다. 이만하면 잘 산다고 생각해요. 근심한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습니까. 재복은 많은데 돈 모으는 재주가 없는 거죠. 모든 게 운명 아닙니까? 기력이 지금 같고 몸이 버텨준다면 코리아 타운을 만들고 싶어요. 자유당 시절에 벤츠 8기통 타고 다녔습니다. 도깨비 같은 인생 나도 몰라요.”
(모스크바=최승현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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