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동포 러시아 이주 30년 연재 ‘모스크바 한국인’ 3 - 지호천 전 회장
한국인 동포 러시아 이주 30년 연재 ‘모스크바 한국인’ 3 - 지호천 전 회장
  • 최승현 기자
  • llpostino.ru@gmail.com
  • 승인 2021.05.08 0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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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눈치 보지 않고 새출발지로 택한 뱃길 없는 곳이 모스크바
한인회 5대, 7대 및 ‘러시아 CIS 한인 총연합회’ 회장 역임
김영삼 전 대통령 방러가 동포 사회 활동 적극 나서는 계기돼

한러수교 30년은 모스크바 한인사회 형성 30년과 동의어다. 10년 세월이 세번 바뀌고 한 세대가 흘러간 긴 세월 속에 꿋꿋하게 모스크바를 지킨 한국인들이 있다. IMF외환위기,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쳐 코로나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모스크바 떠나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를 연재로 싣는다.(주)

3, 한인공동체의 기틀 마련 - 지호천 전회장
 

지호천은 모스크바 동포 사회의 구심점인 모스크바 한인회 5대, 7대 한인회장 역임하면서 한인회 기틀을 다졌다.
 모스크바 동포 사회의 구심점인 모스크바 한인회 5대, 7대 회장 역임하면서 한인회의 기틀을 다진 지호천 전회장.

지호천 전 모스크바 한인회 회장은 모스크바 동포사회의 구심점인 한인회 5대, 7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인회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을 받는다. 2009년에는 모스크바와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조지아(그루지야) 등 러시아와 CIS 한인 단체를 잇는 ‘러시아 CIS 한인 총연합회’를 구성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러시아 CIS 한인 총연합회’는 그의 지도력에 힘입어 단시간에 미주와 중국, 일본, 대양주, 유럽 등의 한인 단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편, 러시아와 CIS 동포사회의 한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단체로 자리를 잡았다. 

지 전회장은 한러수교(당시 한·소) 이후 정착한 1세대 한인이다. 수교 1년쯤 뒤인 1991년 9월 모스크바에 왔다.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 그는 3년간 해기사로 배를 타며 바다를 주무대로 삼다가 28세가 되던 1977년 사표를 내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 부문에서 수출입 규모가 확대되며 대한민국 경제 성장이 가속하는 시기였다.

“대학 졸업 후 기관장으로 배를 탔는데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어요. 당시만 해도 박정희(전 대통령)의 국가 부흥 정책에 힘입어 일본 등에서 군함이나 대형 어선 등을 많이 들여올 때였죠. 해양대를 졸업하면 해군 소위로 임관해 군함도 타고 바로 선장이나 기관장으로 해기사가 될 수 있을 때였습니다. 할 일이 무궁무진했어요.”

선박 공학 분야에 해박했던 그는 금형에 금속을 녹여서 높은 압력으로 주조하는 알루미늄 다이캐스팅(Die-casting) 생산 공장을 10년 이상 운영했다. 그러나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88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경제 발전의 도약이 또 한번 이뤄지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근로자들을 다루기가 여간 어려웠던 게 아니에요. 당시 중소기업인들이 겪었던 공통된 고초라고 봐요. 알루미늄 다이캐스팅이라는 게 기피 업종 가운데서도 특히나 고된 일이었죠. 150명 정도가 근무했는데, 하루 24시간 전일제로 이뤄졌어요. 근로자들이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바로 불량품이 양산되고 사업체의 운명이 노동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었죠.” 

사회보장법 강화, 공인된 노동기준을 요구하는 미국의 무역 관세법 개정과 6.10 민주항쟁, 노동 운동 등 정치적 요인으로 노동법이 1987년 전면적으로 개정됐다. 그해 7월 울산 현대엔진과 현대미포조선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이 본격화했다. 10년 가까이 운영해온 사업체는 한꺼번에 터져나온 근로자들의 요구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30대 초반에 부를 쌓았는데 제 부덕이겠지만 그때 알거지가 됐죠” 

항해사가 돼 바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사업하다 망해 왔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전 세계 항구와 선박 관련 분야 사업체에는 해양대 선후배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뱃길이 없는 곳을 택한 게 러시아, 그중에서도, 바로, 모스크바였다. 

“김치 장사를 하든, 콩나물 장사를 하든 그 누구도 지청구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곳을 찾은 게 모스크바에요(웃음). 친구 한 놈이 가고 싶은 곳을 말하라 하더군요. 자기가 항공권은 끊어 줄 테니 가서 좀 쉬다 오라고요. 당시는 거주 기간 호텔 숙박비를 모두 일시불로 선결제해야 방문 비자를 발급할 때였죠. 일주일 여정으로 무작정 그렇게 모스크바로 왔습니다.”

개방 초기 모스크바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처럼 힘들었다. 남 눈치 보지 않으며 새로 출발하기에 모스크바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아내를 설득했다. 가족을 고국에 남겨둔 그의 혈혈단신, 타지에서의 새 출발은 그렇게 시작됐다.

150㎏ 배낭을 메고 모스크바로 다시 왔다. 수중엔 1,000불이 전부였다.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 청년대학(Институт молодёжи, 현 Московский гуманитар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어학연수 과정에 등록했다. 

“수강료가 한 달에 100달러였어요. 가진 돈은 천 달러인데 일 년 버티기가 힘든 상황이었죠. 학생에 대한 대우가 좋을 때라 학생증만 있으면 어디든 돈 걱정 없이 다닐 수 있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느니 개인 교사를 두는 게 낮겠다 싶어 한 달에 각각 30달러를 주고 두 명의 선생에 러시아어 개인 교습을 받았습니다.”

그의 기억으로는 당시 러시아에서 전문직 종사자들의 임금이 턱없이 낮을 때였다. 교수, 의사, 교사 등의 월급이 1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생활비가 다 떨어져 갈 때쯤 그에게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개인교사의 지인이자 고르바초프 전 공산당 서기장 시절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쉐르바코프(Щербаков,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

옐친 전대통령의 시장경제 정책 도입으로 러시아의 노동시스템도 변화의 태풍에 휩쓸리던 그 때, 고용노동센터를 맡고 있던 쉐르바코프 전 장관이 그에게 러시아 근로자 교육을 위한 한국 견학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보고 배우자는 취지였다.

바이칼 호수에서 부인 박인순 씨와 함께 포즈를 취한 지호천 씨
바이칼 호수에서 포즈를 취한 지호천 전회장 부부.

“러시아에 온 지 반년쯤 지나서 찾아온 기회였어요. 러시아가 시장경제를 도입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시장 경제에 대한 정보와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였죠.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본보기로 받아들이자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대학에 교수로 있는 친구와 논의한 후, 30명씩 수십 팀을 보냈습니다. 삼성과 울산 현대자동차, 마산 공단을 견학하고 노무와 관련한 강의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그 일이 여행사를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됐죠.” 

그는 러시아 개인 교사의 주선으로 이뤄진 쉐브바코프 전장관과의 인연으로 단시간에 목돈을 마련했다. 92년 3월 정식으로 여행사의 문을 열었다. 러시아 최초의 한인 여행사인 한양여행사는 의외로 쉽게 이뤄졌다. 

해방 후 70년간 반공 이데올로기의 그늘에 있었던 한국인들에 개방된 러시아는 신비의 땅이었다. 국내 대표 여행사였던 롯데관광, 한진관광 등이 국내 여행객을 러시아로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러시아의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고요. 대기업의 관광 회사도 접근하지 못하는 루트인데, 러시아에서는 한국으로 사람을 막 보내거든요. 러시아 여행사는 국영 인투어리스트 밖에 없던 시절이니 국내에서 러시아 관광 비자 받기가 쉽지 않았죠. 전 쉐르바코프 전 장관을 통해 간단히 해결했으니 한국에서 여행사를 차려보라고 제안이 왔어요. 비자는 쉐르바코프 전 장관이 사인만 하면 됐어요. 달랑 팩스겸용전화기 한대를 들여놓고 시작한 게 한양여행사의 출발입니다.”  

일주일에 300~400명의 관광객이 한양여행사를 통해 모스크바에 왔다. 1992년 한해에만 10만 달러를 벌었다. 그는 집부터 장만했다. 1993년 12월 러시아는 외국인의 부동산 매입을 허가하도록 법률을 개정했지만, 한인 가운데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안다고 하더라도 수시로 바뀌는 법률로 부동산 매입은 꺼렸다.

한국의 IMF 외환위기와 러시아 모라토리엄이 터지기 전까지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교민사회에 적을 두고 활동하기 시작한 때다.

“같은 한인으로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어요. 특히 유학생을 많이 지원했죠. 여행업의 경우 5월에서 8월이 대목이라 일을 병행하며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특히 쉐프킨 연극대학교에서 수학 중인 학생들이 그랬고, 박신양도 방학이면 우리 회사에서 가이드를 했어요. 모라토리엄이 터지고 난 후 교민들이 많이 빠져나갔습니다. 형편이나 처지가 곤란한 가운데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는데 그들을 알게 모르게 도왔죠. 저는 그래도 집을 소유하고 있어서 먹고 잘 공간이 있으니 나은 편이었어요.”

2015년 7월 개최한 유라시아 친선특급 행사 가운데 인사말 중인 지호천 전 회장
2015년 7월 개최한 유라시아 친선특급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이어 2008년 9월 이명박 전 대통령 방러는 그가 동포 사회에 적극적으로 나선 계기가 됐다. 김영삼 방러 당시 그는 재러경제인협의회 중소기업부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김영삼 방러 동포 환영 팀을 꾸려 공항서 대통령 내외를 영접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방러 전에는 대사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3대 장학정 전 회장의 돌연 사임으로 모스크바 한인회의 회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모스크바 동포 사회를 대표하는 모스크바 한인회 회장이 없는 게 여간 보기 좋지 않다는 거지요. 당시 이규형 주러 대사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습니다. 당시 원로들을 만나 상의를 드렸고 그렇게 추대돼 3년간의 임기를 마쳤지요.” 

그는 한인 동포 사회에는 네트워크 구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한인회 위상을 강화하고 공신력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한인 간 커뮤니티 활성화에 역점을 뒀다. 모스크바 한인회 사이트를 구축해 흩어진 동포 사회의 단합을 도모했다. 한인회 로고와 엠블럼, 현판, 기를 제작했다. 유학생을 비롯해 기업 주재원, 소상공인, 종교 단체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모스크바 한마음 체육대회'를 정례화 했다.

나아가 초대 러시아-CIS한인 총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교민 주거 지역인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연해주와 CIS한인 간 네트워크 강화에 힘을 쏟았다. 러시아 및 CIS 국가의 경우, 한인 대표 기구가 부재해 세계한인회장대회 및 한국 정부 기관 등에 대표성을 인정받기 어려웠지만, 러시아-CIS 한인총연합회가 출범하면서 해당 지역 동포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마련됐다.

그는 몇해 전 개인 소유 대지에 불교도들을 위한 한인 사찰 불사 서원을 세웠다. “아내가 독실한 불자예요. 한국 사찰을 여법하게 건립해 불자 한인들에게 종교 생활의 기반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한인 성당이나 원불교 교당, 한인 교회는 각자 독립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불교는 그렇지 못하죠. 불사하며 모스크바 교민 사회 발전도 기원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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