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디지털 주권', 최근들어 부쩍 강조되는 이면에는 뭔가 있다?
러시아의 '디지털 주권', 최근들어 부쩍 강조되는 이면에는 뭔가 있다?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1.06.02 0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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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법원, 금지 콘텐츠 삭제 거부 페북 유튜브 틱톡 등에 과징금
통신감독청, 유튜브 속도제한 경고, 동성애 광고및 만화영화 방영 금지

러시아가 4차(지식) 산업혁명 시대에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디지털 주권 (digital sovereignty)의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디지털 주권'이란 용어는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사용된(souveraineté numérique) 개념으로, 국경이 없는 사이버 공간에서 한 국가의 정체성과 이익을 지키기 위한 사이버상의 통제 권한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디지털화에서 미국에 뒤쳐진 프랑스의 일부 학자들이 구글과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등과 같은 다국적 IT기업이 프랑스인들의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우려에서 제기한 것이다.

사진출처:픽사베이.com

특히 인공지능(AI)의 원천인 '빅데이터'가 IT 기업들에게 최대 수익 창출 자원으로 등장한 상태에서 국가는 자국민의 개인 정보를 보호하고 일부 기업의 시장 독과점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유시장경제 원리와 충돌하는 측면은 없지 않으나, 국가의 정체성 혹은 존재 가치와도 연결되는 점에서 '디지털 주권'을 언제까지나 마냥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프랑스와는 그 목표나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러시아는 일찌감치 다국적 IT기업들이 가진 자국민의 개인 정보 데이타베이스(DB)를 러시아내에 둘 것을 의무화하는 등 '디지털 주권' 강화에 나섰다. 최근에는 50만명 이상의 러시아인 이용자를 지닌 IT기업은 러시아에 대표 사무소(법인)를 두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이 국가두마(하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내년 1월 1일 발효를 겨냥한 이 법안은 다국적 IT기업이 러시아 국내법을 위반할 경우, 곧바로 러시아 법인에 그 책임을 묻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통신 감독청, 7월 1일까지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러시아 (개인) 정보의 현지화 강제/얀덱스 캡처

러시아가 '디지털 주권' 강화에 나선 것은 유튜브 페이스북 등과 같은 소셜 미디어(SNS)의 영향력을 위협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SNS를 통해 급속히 확산되는 '반체제' 메시지를 차단하려다 보니, 다른 플랫폼을 통해 전달되는 콘텐츠들도 같은 선상에서 규제 대상에 올리는 듯한 느낌이다. 

법적 근거도 마련됐다. 지난해 12월 채택된 SNS 관련 법안은 SNS 기업에게 금지된 콘텐츠를 차단하도록 의무화했다. 사회와 국가 질서, 러시아 헌법 등을 훼손하는 정보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요와 극단주의를 요구하는 정보에 대한 접근도 SNS 기업은 차단해야 한다. 

땅이 넓은 러시아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사이버상의 소통 수단인 SNS가 절실하다. 유튜브와 페이스북 외에 트위터, 인스타그램, 텔레그램, (중국의 동영상 플랫폼) 틱톡까지도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다.

실제로 '반 푸틴' 야권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 체포 당시, 러시아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된 대규모 시위는 대부분 SNS를 통해 전파됐다. 유튜브의 나발니 계정 팔로워(구독자) 수는 러시아 국영 TV 채널의 구독자보다 훨씬 많다. 나발니 측은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고 시민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기본 소통 도구로 유튜브 계정을 활용했다. 유튜브 메시지는 곧바로 페이스북과 트위터, 텔레그램, 틱톡 등을 통해 전 연령층에 전달됐다. 

지난 2월 나발니 공식 유튜브 채널 '나발니Live'를 통해 시위 중단을 발표하는 '나발니 지역 네트워크' 책임자 레오니드 볼코프/캡처 

벨라루스 당국의 라이어 에어 여객기 강제착륙 사건도 지난해 대선불복 시위 당시 '넥스타 Live'라는 텔레그램 계정을 통해 시위대에 영향력을 미친 운영자를 체포하기 위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시위 당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도 '넥스타 Live'의 실제적 위협을 러시아 언론에 여러차례 강조한 바 있다.

러시아 통신감독 당국인 통신·정보기술·매스컴 감독청(로스콤나드조르, 이하 통신감독청)이 최근 미국의 IT 기업에 대한 통제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발니 측의 반 정부시위에서 그 영향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튜브에 대해서는 그 정책이 ‘투명하거나 객관적이지 않고, 예측 가능하지도 않다’는 이유로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모스크바 법원, 금지 콘텐츠 삭제를 거부한 구글측에 600만루블의 과징금 부과/얀덱스 캡처

현지 언론에 따르면 모스크바 타간스키 구역 치안법원은 지난(5월) 27일 유튜브를 운영하는 구글에 350만 루블(약 5천3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금지된 콘텐츠를 충분히 걸러내지 않고 있다는 이유다. 이틀 전에도 비슷한 혐의로 600만 루블(약 9천100만원)의 과징금 판결을 내렸다. 

여기서 금지된 콘텐츠란 크게 테러 및 극단주의, 마약, 미성년자의 포르노 등(을 포함한 사이트, 계정)을 의미한다. 그속에는 당연히(?) 러시아 정부에 의해 극단주의 단체로 규정된 반정부 콘텐츠(사이트, 계정)가 포함된다. 

구글(유튜브)의 경우, 통신 감독청에 지적을 받은 콘텐츠(사이트, 계정)는 무려 5천여개에 이른다. 이 중 3천500개는 '극단주의', 900여개는 법원에 의해 이미 금지된 콘텐츠라고 한다. 구글은 이미 2018년 12월 50만 루블, 2019년 70만 루블, 2020년 5월과 12월 각각 150만 루블과 3백만 루블의 과징금 처분을 받았지만, 금지된 콘텐츠(사이트)에 대한 링크가 여전히 20~30%나 남아 있다는 게 통신 감독청의 주장이다. 

통신 감독청, 구글 트래픽(속도) 제한 용인/얀덱스 캡처

구글 측이 콘텐츠(링크)를 삭제하지 않고 버티면 과징금 부과는 늘어난다. 과징금은 최대 연 수입의 10%까지 가능하다. 그리고 구글(유튜브) 서비스의 속도를 늦추는 제재도 고려될 것이다. 

타간스키 구역 치안법원은 트위터에 대해서도 허가되지 않은 시위(나발니 석방 촉구 시위)에 미성년자의 참여를 호소하는 메시지와 같은 금지된 콘텐츠를 삭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0만 루블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틱톡'도 같은 이유로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페이스북에 대해서는 지난 25일 2천600만 루블(약 3억9천만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통신 감독청의 마지막 수단은 서비스 속도의 제한이다. 통신 감독청은 지난 25일 "트위터가 금지 콘텐츠의 91%를 삭제하면서 구글(유튜브)이 불법 콘텐츠 양에서 1위로 올라섰다"면서 "구글에 대해 서비스 속도 제한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앞서 트위터는 지난 3월 10일부터 속도 제한 조치가 단행되자 서둘러 금지 콘텐츠 삭제에 들어갔다. 그 결과, 지난 5월 중순 속도제한 조치가 해제됐다. 불법 콘텐츠의 91% 이상이 제거됐기 때문이라고 통신 감독청은 확인했다. 

통신 감독청의 SNS 규제는 지난 2018년 4월 텔레그램 서비스를 아예 차단함으로써 러시아인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토종 SNS 브콘닥테(vK)를 개발한 두로프 형제가 독일로 망명한 뒤 만든 메신저다. 당연히 러시아 사람의 입맛에 딱 맞는 시스템(자동 삭제 기능 등)으로 개발됐고,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의 개인정보 요구를 거부하다 '서비스 차단'이라는 철퇴를 맞았다. 두로프 형제는 우회 접속 경로를 개발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했지만, 이미 과거의 영광으로 묻혀가고 있다. 

동성애가 문제된 '돌체앤가바나' 광고/캡처

최근에 주목받는 콘텐츠 규제는 '동성애'에 관한 것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원은 지난 5월 14일 이태리 명품 브랜드 '돌체앤가바나'가 인스타그램에 게재한 '동성애' 광고 금지에 대한 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 광고는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돌체앤가바나가 진행한 ‘Love is Love(사랑은 사랑이다)’ 캠페인으로, 두 개의 짧은 동영상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 하나는 두 여성이 키스하는 '동성애'를 보여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법원 측은 “가족의 가치를 거부하고, 비 전통적 성관계를 선전하는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검찰의 주장이 입증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내달(6월) 7일 심의를 속개하기로 했다. 

통신 감독청, 디즈니 채널측에 어린이에게 유해한 콘텐츠 (방영) 금지 경고/얀덱스 캡처 

또다른 동성애 콘텐츠는 디즈니사의 만화 영화 'Out'다. 통신 감독청은 지난 28일 디즈니 TV 채널측에 공문을 보내 "비 전통적인 성적 취향을 지닌 만화 영화 'Out'은 러시아에서 상영될 수 없다"고 전했다. 지난해 픽사(Pixar)사가 지난해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와 함께 만든 이 만화 영화는 '부모를 속이고 파트너와 함께 대도시로 가고자 하는 젊은 게이'가 주인공이다. 

그러나 디즈니 TV 채널 측은 "이 영화는 아직 방영되지도 않았고, 방영될 계획도 없다"며 감독 당국의 과잉 규제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에 당국은 "예방 차원"이라고 했다.

러시아에서 동성애가 비합법은 아니다. 미성년자 간의 비 전통적인 성관계를 조장하거나 선전 홍보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지난 2013년 통과됐다. 인권 단체들은 당연히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적대감을 높인다며 비판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성적 지향을 포함해 일정 분야에서 소수에 대한 국가적인 차별이 존재했다고 인정한 뒤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현실은 아직 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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