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동포 러시아 이주 30년 연재 ‘모스크바 한국인’ 4 - 황부용 사장
한국인 동포 러시아 이주 30년 연재 ‘모스크바 한국인’ 4 - 황부용 사장
  • 최승현 기자
  • llpostino@naver.com
  • 승인 2021.06.03 09: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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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라닉스 설립... 상즉인(商卽人) 되새기며 기업 운영
한국 제품 우수성 알리며 공공이익, 사회적 선 실행 모범
나무심는 경영인 - 황부용
나무심는 경영인 - 황부용 사장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 경영이 요구되는 시기다. 황부용<사진>사장의 경영 철학은 조선 중기 무역 상인 임상옥(林尙沃, 1779년 ~ 1855년)을 닮았다. 상즉인(商卽人). “장사는 이익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지요.” 기업인으로서 황부용이 30년간 가슴속에 새겨 온 좌우명이다.

황 사장은 지난 1995년 모스크바에 라닉스(LANIX)를 설립했다. 3명의 직원은 이제 100명으로 늘었다. 라닉스는 러시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중소기업으로 우뚝 섰다. 내수 시장의 판로를 개척하면서 러시아 시장에 한국 제품의 우수성을 알렸다. 공공 이익과 사회적 선을 실행에 옮기며 '나눔 경영'도 지속했다. 

그는 1994년 모스크바에 왔다. 대국(大國)이 적성에 맞았다. 도전과 실패, 변화는 두렵지 않았다. 안정된 생활보다 야망을 택했다. 러시아에 오기 전 LG상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대기업 생활을 접었다.

처음엔 미국행 항공권을 끊었다. 한국에서 미국 이민 붐이 일던 1980년대 중반이었다. “교수가 되려 했지요. 졸업과 동시에 불어 교원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고등학교 선생은 성에 차지 않고 대장부가 대학 강단에는 서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했죠. 그러다 생활과 학문 사이에서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단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관심을 가진 분야가 3차 산업혁명의 상징인 컴퓨터 정보통신 분야였어요.” 

1975년에 세계 최초 개인 컴퓨터가 개발되고 80년 중반 애플사에서 만든 가정용 컴퓨터가 시나브로 대중화하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자동화 혁명의 도래를 직감했다. 데이콤 미국 현지법인에 취업했다. 그리고 8개월간 소프트웨어 개발 부서에서 일했다.

“초창기 컴퓨터 시장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지요. 미국에 정착했다면 아마 지금 큰 규모의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를 운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40대 중반에 황 사장은 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미국보다 작은 곳은 눈에 안 찼다. 중국과 러시아가 시야에 들어왔다. 중국 시장 성장 가능성에 ‘탈 한국 입 중국’ 현상이 호황을 이룰 때였다.

그는 멀리 내다봤다. 시장경제 도입 초반의 러시아 시장이 중국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안정보다는 모험을 선택했다. 기질이었다. 그는 세계사를 탐독했다. 국가의 쇠락과 부흥, 흥망성쇠의 역사를 되짚었다. 그러면서 인구 1억 5천.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나라. 소련 시절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초강대국 러시아 시장 점령의 꿈을 키웠다. 

1년간의 시장 조사를 마치고 1995년 라닉스를 설립했다. ‘라’는 이집트의 태양의 신을, ‘닉스’는 독일의 '물의 요정'을 뜻하는 합성어다.

“처음에는 여러 아이템을 취급했어요. 그러다가 서울에서 사업 동료를 만나면서 벽시계와 원단을 주요 사업 품목으로 정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현금 거래를 했던 당시에는, 특히 구매자에 대한 ‘신뢰’ 가 관건이었어요. 그때 관상학 책을 보며 사람을 판단하기 시작했죠. 어떤 사람이 믿을 만한지, 아닌지를 관상학적 관점에서 눈과 입을 관찰해 보면 알 수 있어요. 50%는 맞더라고요. 입은 감언이설을 해도 눈은 거짓말을 못하거든요. 그렇게 외상 거래를 시작했죠.”

재러중소기업협의회는 1995년 라닉스 황부용, 유포토 유시응, 라임 하우스 김동관이 주축이 돼 발족했다
재러중소기업협의회는 1995년 라닉스 황부용, 유포토 유시응, 라임 하우스 김동관이 주축이 돼 발족했다/사진 출처:라닉스 

사업 초기, 운동화나 액세서리 등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던 황 사장에게 어느 날 현지 중개상인 한 명이 컨테이너 한 개 분량의 시계를 주문했다. 한 달 안에 팔겠다고 약정했다. 그때 벽시계 수요가 많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날 때가지 현지인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한 번  해보자.” 대기업에서 영업직에 종사하면서 체득한 경험과 노하우가 있었다. 영업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라닉스에서 근무하는 '창업 동지' 격인 사샤 박(알렉산드르 박)과 함께 매일 시계방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알게 된 게 러시아에선 벽시계가 가구점에서 취급된다는 사실이다. 이후 2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모스크바와 수도권에 있는 가구점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외상은 물론 배달, 위탁 판매 후 수금 등 최악의 조건도 수용했다.

2년간의 발품이 끝날 즈음에야 손익분기점을 넘어서고, 영업 이익이 발생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택시를 잡고는 왼쪽 손바닥에 침을 뱉고 오른손으로 때려서 타액이 튄 방향으로 무조건 내달렸어요. 모든 게 운명이라 생각했죠. 그렇게 2년을 보냈어요. 날마다 사방팔방 모스크바 전역을 그렇게 들쑤시고 다녔죠. 집에 오면 온몸이 쑤셨어요. 김국환의 ‘타타타’를 들으며 보드카로 피로를 잊곤 했습니다.” (웃음) 

진인사대천명.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황 사장은 현지 파트너들의 마음을 사기로 했다. 러시아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에 대한 현지인들의 믿음과 신뢰는 결국 거래 증가로 이어졌다. 조금씩 사업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돈이 목표였다면 다른 일을 했을지도 몰라요. 최인호 (1945~2013) 작가의 소설 『상도』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란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다. 작은 장사는 이문을 남기기 위해 하지만 큰 장사는 사람을 남기기 위해서 한다.’ 경영인으로서 마음에 새기고 있는 좌우명입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러시아가 모라토리엄(Moratorium, 대외채무 지급유예)을 선언하면서 경제 위기가 도래했다. 직원에게 줄 월급은 물론, 채무 변제마저 어려웠다. 교민들은 썰물 빠져나가듯 모스크바를 떠났다. 그도 잔류와 떠남 사이에서 고민했다.

때마침,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모스크바 무역관이 해외진출전략 프로그램 일환으로 진행한 6박 7일간의 발트3국(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탐방 기회를 잡았다. 처음 러시아 진출 계획을 세웠던 4년 전과 같이, 황 사장은 러시아 시장을 멀찌감치서 다시 들여다봤다. 자신의 선택을 재확신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는 여러모로 기회의 땅이었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때부터 사업 아이템을 다각화했다. 한 아이템이 고전을 겪게 되면 다른 아이템으로 손실을 보완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벽시계와 원단에 이어 식품과 생필품, 화장품에 도전했다. 기다림 끝에 승부수를 띄우기 수차례, 사업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한국에 지사를 설립했다. ‘라미윤’ ‘라소윤’ 등 화장품을 비롯한 자사 PB(private brand products) 상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사업을 확장한 시기에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실패 경험이었어요. 그때의 처방전으로 고전을 겪을 때마다 약을 지었죠. 실패의 주요인을 꼽자면, 자본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돈 벌 생각만 했고, 실패에 대한 대비책은 세우지 않고 오직 믿음만으로 사업을 이끌려고 했던 무지라고 봐요. 자신에 대한 믿음만 가지고 집중했어요. 하지만 위기를 늘 기회라 여겼고 발전과 후퇴를 거듭하며 그렇게 여기까지 왔네요.”

모스크바 사옥 곳곳에는 사훈과 사시(社是) 등 기업의 경영철학을 대변하는 상징물이 여럿 있다. 사내 벽면에 부착된 신규 고객 지도에는 라닉스의 지난한 여정과 성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러시아 전도에 수놓은 형형색색의 표식은 13세기 유라시아의 광활한 대륙에서 영토를 확장했던 바투 칸 기마군단의 깃발과 그들의 행렬을 연상케 한다. 러시아 전역의 사업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지도다. 그는 라닉스 직원들이 신규 거래처를 오픈하면 직접 핀을 꽂아 지도를 업데이트한다.

“스스로 판로를 개척했다는 성취감은 삶의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어요. 경영 가운데 인재 양성은 기업을 떠나 대한민국과 러시아의 미래 자산을 증식하는 일입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되뇌며 살아왔어요.”

라닉스의 사훈이 담긴 대형 현수막이 눈에 띈다. ‘Я знаю, Я могу, No passion NO future, TOP(Together open mind passion!)’ 성취와 야망, 열정과 성공의 키워드를 함축하고 있다.

라닉스 직원 및 바이어와 포즈를 취한 황부용 사
라닉스 직원 및 바이어와 포즈를 취한 황부용 사장

황 사장은 또 이전 사옥에서부터 현재까지 마당에 나무를 심어왔다. 

“내가 속한 곳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뜻으로 20여 년 간 회사 앞마당이나 텃밭 등에 식수해 왔어요. 사원 모두가 함께, 이곳, 모스크바에 나무를 심으며,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주인이 돼 역사를 만들어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러시아인은 참 흥미롭게 보더군요. 이방인이,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텐데 나무 심는 모습이 인상  깊었나 봐요. 얼마 전에 신사옥으로 이전했는데, 이전 사옥의 새 주인들이 나무를 보면 한국인에 대해 다시 보겠죠? 그들은 삶의 가치를 알고 모스크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요.” 

황 사장이 동포 사회에서 인정받는 이유는 또 있다. 남다른 교민 사회에 대한 애정과 사회 공헌 활동 때문이다. 그를 비롯해 유시응, 김동관 사장 등이 재러시아 한국중소기업협의회 창립 구성원이다. 그는 5대 회장을 역임했다. 재러중소기업협의회는 1995년 12월 발족했다. 

“대기업 주재원은 임기를 마치면 돌아갈 사람들이지만, 중소기업은 이곳에 뿌리를 내릴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교민 사회에 주축이 될 가능성이 크죠. 중소기업 대표들은 결정권자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모여 의논하고 단합하는 게 교민 사회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요.”

유학생들을 비롯해 모스크바 원광학교 등 한인 단체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왔다. 모스크바에서 그의 도움을 빌리지 않은 단체가 없을 정도다.

“해외에서는 동포들이 서로 합심해 지속 생존 가능한 터전을 조성해야 합니다. 희로애락을 함께 공유할 공동체가 꼭 필요해요. 대부분 돈을 번 후 돌아가겠다고 생각하면 서로 간에 정분을 틔울 이유가 없죠. 교민 사회는 형제부모 지간처럼 이끌고 이끌어 줄 관계가 필요해요. 동포 사회 발전을 위한 조력자.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에요.” 

황 사장에게 경영인으로서의 마지막 꿈이 있다면 라닉스 상품을 북한에 유통하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사 확장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이유다.

“라닉스의 신규 고객지도는 러시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북녘 동포들이 우리의 제품을 사용하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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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진 2021-06-15 15:13:45
열정과 패기가 멋지시네요,더욱 번창하셔서 한국을 빛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