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동포 러시아 이주 30년 연재 ‘모스크바 한국인’ 5- 박상일 사장
한국인 동포 러시아 이주 30년 연재 ‘모스크바 한국인’ 5- 박상일 사장
  • 최승현 기자
  • llpostino@naver.com
  • 승인 2021.06.11 06: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스크바서 인생 삼모작... 91년 코오롱 상사 주재원으로 인연
예순 넘어 언어학 석사에 도전...졸업 후 진로는 한국어 강사로
모스크바 한인성당 신도와 함께. 윗편 왼쪽에서 세번째가 박상일 씨, 가운데 오른쪽 두번째 유옥경 씨
모스크바 한인성당 신도들과 함께. 윗편 왼쪽 세번째가 박상일 사장, 가운데 오른쪽 두번째가 부인 유옥경 씨

박상일 사장은 1991~95년 코오롱상사 모스크바 지사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임기를 마친 후 귀국했으나, 1998년 IMF 위기로 사내에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면서 모스크바로 복귀했다.

모스크바와의 인연은 동유럽에 자유화 물결이 거세게 몰아쳤던 지난 198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됐다. 빈에서 근무한 2년은 동유럽 공산주의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던 시절. 동독을 오가면서 개혁을 갈망하는 시민들을 목도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도 근거리서 지켜봤다.

소련의 개방 이전 러시아를 방문한 한국인들은 주로 지상사 주재원과 선교사들. 그중에 박사장도 끼어 있었다. 그도 1990년 출장 차 모스크바에 여러 번 방문했다.

"철의 장막으로 빗장이 굳게 닫혀 있었을 것이라고들 생각하지만, 당시 종합상사에 근무하는 주재원의 경우 국영무역회사였던 라즈노엑스포트 등에서 비자를 받아 사업차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일이 잦았어요. 그때 모스크바와 첫 인연을 맺었지요. 겨울이었는데, 잿빛 하늘 아래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회색빛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냉전 종식의 역사적인 시기에 박사장이 모스크바에서 마주한 것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이념적 대립이 아니었다. 식솔을 건사하는 가장, 등굣길에서 콧물을 훌쩍이며 서성이는 아이, 좌판에서 식료품을 파는 중년의 여성. 바로 자잘한 일상이었다.

그는 분단을 명분으로 반공논리에 종속된 한국에서 자란 세대였다.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나라에서 온 이방인의 눈에 소련은 낯설거나 생경하지 않았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네….”
“사람들의 눈빛이 매우 맑았어요. 시골 사람들처럼 순수한 면이 엿보였지요. 체제를 비판하거나 정치적인 언행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첩보요원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주니 역설적이게도 안전을 보장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죠.(웃음)”

그는 90년 2월부터 3번 가량 모스크바로 출장을 온 뒤 이듬해 지사를 세우고 주재원으로 부임했다. 개방 직전의 소련 출장에서는 소련과의 직접 사업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한소수교(1990년 9월 30일) 이후 코오롱 상사를 비롯한 국내 대기업들은 소련 진출을 모색했고, 1991년 소련에 ‘외국인 투자법’이 제정되자, 앞다퉈 모스크바로 들어왔다. 코오롱 상사도 그 중의 하나였다.

박 사장은 95년까지 5년간 모스크바 지사에서 근무한 뒤 귀국했다.
“대기업의 경우 각 부서별로 철저하게 업무가 분담돼 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시스템을 모르는 와중에 선뜻 개인 사업체를 꾸리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했죠.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고, 다만 맡은 바 업무에 충실했던 것 같아요.” 

인연은 1998년 다시 찾아왔다. 위기는 늘 기회인 법. IMF 위기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을 때다. 넌지시 아내인 유옥경(現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모스크바 협의회 회장)씨의 의중을 떠봤다.

“여기 있으나 거기 있으나 살 궁리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요 뭘. 버틸 각오가 돼 있으면 가봐요.”

호쾌한 답변이었다. 4년 간 버티며 터전을 마련해 보자. 실패하면 돌아오면 그뿐이다.

“아내에 늘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아내가 젊었을 적에 나와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 못한 것은 아닌지 아쉬울 때가 많아요.”

가족들이 모스크바로 이주한 것은 2004년. 그가 모스크바로 다시 돌아온 지 5년째였다. 현재 모스크바교민 사회에서 아내 유옥경 씨는 누구보다 대외 활동에 적극적이다. 한인회 부설 토요한글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하며 토요일마다 교사 점심을 직접 챙긴 지도 벌써 6년째다.

2018년에는 대통령 직속 헌법기구인 민주평통자문회의 모스크바 협의회 19대 회장을 맡아 평화 통일을 위한 교류 협력 활동에도 매진하고 있다. 공적인 행사가 열리는 자리마다 그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 모스크바를 살뜰히도 챙기셔요.” 주변 지인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19기 민주평통모스크바협의회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 유옥경 씨
19기 민주평통모스크바협의회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 유옥경 씨

42살 중년의 나이에 어학연수 과정을 마치고 1999년 학사 본과에 입학한 박 사장은 러시아어 구사가 가능해지자 본격적으로 개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직원 명의로 개인사업자 등록을 마쳤다. 5년여 주재원 생활 속에 체득한 '비즈니스 노하우'가 큰 밑거름이 됐다.

사업 아이템은 주재원 시절 다뤘던 섬유였고 그 가운데 원사 및 원단 등 직물 수입 및 유통, 중계무역이 주 업종이었다. 그러나 활로 개척은 쉽지 않았다. 이미 동종업계에서 활동하는 수입상이 많았다. 

그는 섬유관련박람회가 열릴 때마다 참가했다. 참관객들에게 자사 제품을 홍보하고 사업 기회로 연결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는 적격이었다. 전시회 준비로 밤샘 작업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구매자들에게 브랜드를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면서 현지 바이어들과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이렇게 3년 간 절치부심한 끝에 희망의 빛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귀국을 염두하고 있을 때 계약이 성사됐어요. 취급한 폼목이 원사인데요, 사람들은 자주 인생을 실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인생이 잘 풀린다’ ‘꼬였다’ ‘그 사람과 잘못 엉켰다’ 이런 표현들이요. ‘실’이 삶의 오마주로 쓰일 때가 많죠. 일이 마구 엉켜 도저히 어쩌지 못할 것 같을 때 서서히 사업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안정을 되찾은 이후 가족들을 데리고 왔다. 사업체가 커지자 법인을 설립했다. '인포얀'이다. 삶에 생애 주기가 있듯 사업도 마찬가지다.

“사업을 시작한 후 10년간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뛰어온 거리만큼 사업도 상승곡선을 탔죠. 하지만 '엘리어트 파동'처럼 언젠가는 하강 곡선을 타게끔 마련이죠. 그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였던 것 같아요. 그 때가 변곡점이었죠” 

그는 어느 순간에도 자신을 몰아 세우지 않았다. 고비 고비 순응했다. 아내인 유옥경씨도 그런 남편의 성정을 잘 알았다. 늘 지지했다.

2000년 후반 뇌경색 초기 진단을 받았다. 술을 끊고 마라톤을 시작했다. 마라톤도 달리는 동안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느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게 신체 변화를 관찰하며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뛰어야 한다. 그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다.

8년 전 시작해 풀코스 9번을 포함, 헬프 코스까지 쉰 차례 정도 완주했다. 작년 석사 과정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주 5일을 뛰었다. 여러 명이 함께했다. 그 가운데 손정락과 이철수, 조경열 등이 현재 마라톤 동호회 회원이다.

박 사장에게 위기는 늘 기회였다. 이순이 넘은 고령에 러시아민족우호대학교 언어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는 최근 한국어교원 자격증도 땄다.

“코로나 19로 발이 묶여 있는 상태죠. 다들 어려운 시기에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희망차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하루 24시간이 모자라요.”

주말을 제외하고 날마다 온라인 강의를 수강하고 저녁이면 7시간씩 그날 배운 과정을 복습한다. 모국어로도 쉽지 않은 언어학 강독, 형태론, 통사론, 언어의 기원을 원문으로 읽고 받아 적는다. 마라톤으로 다져진 체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어렵죠. 난공불락이에요. 하루 꼬박 12시간을 공부하는데 할애해요. 마라톤과 비슷해요.” 

아들에게 사업을 맡긴 박 사장은 석사 학위 취득후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한류 바람으로 한국어 학습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부쩍 늘고 있다고 해요. 나라에 보탬이 되고 공적인 차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죠. 토요한글학교에서 교장으로 있는 아내의 조언도 큰 몫을 했고요. 언어학과를 입학한 동기도 여기에 있죠. 러시아어를 잘 하는 한국어 교사가 돼 이곳 또는 동남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어요.”

20대부터 40대 초반까지 직장 생활한 이후 42세에서 60대 중반까지 개인 사업으로 이모작을 마무리 한 그는 이제 한국어 교사를 꿈꾸며 삼모작 중이다. 그 터전은 모스크바다.

“모스크바가 제 삶의 터전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라도 있어요. 영주권도 받았고요. 시쳇말로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할까요? 주파수가 비슷해요. 주변 지인들은 그렇게들 말해요. 30년을 살아낸 것만 해도 존경스럽다고요. 이미 세계화된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어요. 어디에 한정짓는 건 고리타분한 생각이죠.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가 중요한 세상이잖아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