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올림픽-러시아) 도핑 징계에도 주눅들지 않는 선수단, 금 8개로 4위권 - 속앓이도
(도쿄올림픽-러시아) 도핑 징계에도 주눅들지 않는 선수단, 금 8개로 4위권 - 속앓이도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1.07.30 07: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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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란 국가 정체성을 박탈당한 채 2020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러시아 선수단, 즉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선수들이 대회 현장에서는 조금도 주눅든 모습을 보이지 않고 선전 중이다. 2014 소치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반도핑 위반 혐의로 국제 스포츠계의 제재를 받은 러시아는 지난 2016 리우데자네이루하계올림픽,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는 각각 육상 등 일부 종목의 출전이 아예 금지되거나, '러시아 출신 올림픽 선수'(OAR)라는 개인 자격으로 출전, 기가 죽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러시아 국명이나 국기(삼색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단복을 찢어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삼색기'를 귀국 비행기에서 공개하는 피겨스케이팅 은메달리스트 메드베데바/SNS, 동영상 캡처 

 하지만 이번 도쿄올림픽에서는 전혀 징계받은 티가 나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8일 "도핑 스캔들에 따른 제재조치가 도쿄올림픽에서 러시아(팀)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제재를 주창한 세계반도핑기구(WADA)의 올리비에 니글리 사무총장은 개막 직후 기자들에게 "도쿄올림픽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러시아 제재 효과를 얻지 못했다"며 "특히 유니폼이 그렇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러시아는 제재로 인해 유니폼에 러시아 국기(國旗)나 국가(RUSSIA)명을 쓰지 못하지만, 경기장에서 러시아 선수들을 확인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유니폼이 러시아 국기의 삼색, 즉 '빨강, 하양, 파랑'으로 디자인됐고, 오륜기 위에 삼색 물결 표식이 들어간 국가명(?)을 쓴다. 대회가 사흘째에 접어들면서 올림픽을 취재중인 한 러시아 기자는 "우리가 제재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러시아 펜싱 선수의 다리에 RUSSIA 국가명 대신 새겨진 러시아올림픽위원회 표식/사진출처:ROC 텔레그램

그런 분위기는 이미 지난달 30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열린 올림픽 출정식에서부터 엿보였다. 러시아 싱크로나이즈드 종목을 상징하는 세계적인 스타인 스베틀라나 로마시나는 이날 푸틴 대통령 앞에서 "비록 국기와 국가는 없지만, 우리와 우리의 팬들, 그리고 전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어느 나라를 대표하는 지 알고 있다"며 자긍심을 갖고 경기에 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지난달 30일 크렘린에서 열린 도쿄 올림픽 출정식에서 필승 각오를 다지는 로마시나 선수/사진출처:크렘린.ru

경기력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 즉 ROC는 미국과 일본 중국 등 체조 강국들을 잇따라 꺾고 남녀 체조단체전에서 나란히 우승을 차지했으며, 29일에는 펜싱 여자 플뢰레 단체전에서 13년만에 우승, 금메달 수를 8개로 늘렸다.

'ROC는 29일 현재 금 8, 은 11, 동 9로 중국(금 15, 은 7, 동 9), 일본(금 15, 은 4, 동 6), 미국(금 14, 은 14, 동 10)에 이어 4위다. 안타까운 것은 1, 2. 3위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점. 특히 메달이 쏟아지는 육상종목의 경기가 시작되면 그 격차는 더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육상 강국인 러시아가 제재로 인해 단 10명만 경기에 출전하기 때문이다. 육상종목에서 올림픽 출전 기준 기록을 통과한 선수는 수십명이지만, '출전 선수10명'으로 제한되는 자람에 출전 선수들을 고르고 또 골랐다는 게 현지 언론의 보도다. 

러시아는 앞으로 호주와 영국 등과 4위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ROC 여자 플뢰레 대표팀은 이날 일본 지바의 마쿠하리 메세에서 열린 대회 단체전 결승에서 프랑스를 45-34로 제압했다. 2008년 베이징 대회 이후 13년 만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이탈리아에 져 은메달에 머물렀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 땐 아예 열리지 않았다. 

여자 펜싱 플뢰레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ROC 선수들/사진출처:ROC 텔레그램 계정
금메달의 순간들

ROC 선수단이 도핑 제재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것은 신종 코로나(COVID 19) 사태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무관중을 원칙으로 경기가 치러지고, 과거에 비해 취재 기자들도 많지 않은 데다가 소위 '섹스 방지 침대'나 폭염 등 전례없는 올림픽 현장의 사건사고들이 러시아의 징계 사실을 덮어버렸다.

공식 행사에서는 러시아 제재를 위반하는 사례가 나오기도 했으나 유야무야 넘어갔다. 단적인 예로 23일 개회식에서 러시아 선수단의 입장시 러시아란 국가명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로 언급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제재에 따른 서글픔이 완전히 사라지진 것은 아니다. 우선 좋은 경기력을 펼친 뒤 시상대에 섰을 때, 러시아 국기 대신 ROC 깃발이 올라가고 국가 대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흘러나온다. 흘린 땀과 고생을 보상받는 감격적인 순간, 가슴 깊숙이에서 치솟는 감정은 뿌듯함보다 서글픔이 더 클 게 분명하다. 

고개를 떨군 메드베데프 선수. ROC는 "다닐, 고맙다"고 격려했다/사진출처:ROC 텔레그램

선수들은 경기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테니스 남자 세계랭킹 2위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28일 이탈리아의 파비오 포그니니를 2-1(6:2, 3:6, 6:2)로 꺾고 8강에 진출했을 때, 칠레기자로부터 모욕적인 질문을 받았다. 남자 단식 3회전 도중 심판에게 "날씨가 너무 덥다"며 "내가 죽으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 항의한 바로 그 메드베데프 선수다.

칠레 기자는 그에게 "러시아 선수들은 이번 대회에서 사기꾼(?)으로 낙인찍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메드베데프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 측에 그 기자의 퇴출을 요구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도 칠레 기자의 질문을 '모욕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 영향인지, 이튿날 메드베데프는 8강전에서 탈락한 뒤 고개를 떨궜다. 

은메달을 따고 환호하는 러시아 여자 조정선수들/사진출처:ROC
미국 조정선수, 러시아 선수들의 은메달을 보기 싫다고 말해/얀덱스 캡처

비슷한 일은 조정경기에서도 벌어졌다. ROC 소속의 엘레나 오랴빈스카야와 바실리사 스테파노바가 29일 조정 여자 무타페어(조타수가 없는 복식경기)에서 은메달을 차지하자, 미국의 메간 칼모 선수가 SNS에 러시아 선수들을 비하하는 포스팅을 올렸다. 그녀는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 선수들은 도쿄(올림픽)에 오지 말아야 했다"며 "러시아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 성공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역겹다"고 비난했다. 정작 칼모 팀은 10위에 그쳤다.

러시아의 조정 종목 메달은 지난 2004년 이후 처음이다. 마지막 메달은 아테네올림픽에서 딴 남자팀의 금메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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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시아 2021-07-30 16:49:00
미국 수영선수도 금메달을 러시아, 즉 ROC에게 넘겨주자 '대회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30일 열린 배영 200m 경기에서 예브게니 릴로프(ROC)가 1분53초27의 기록으로 미국의 라이언 머피(1분54초15)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종목의 최강자는 미국이었다.
릴로프 선수는 지난 27일 열린 배영 100m에 이어 200m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머피는 200m서 3위.
그러나 머피는 "이번 대회가 공정하냐"는 질문에 "15가지 생각 중 13가지가 의문을 제기한다"며 "공정하지 못한 시합에서 수영하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라며 러시아측(의 반도핑 위반혐의)을 겨냥했다.
릴로프는 "그의 의문을 이해할 수 없다"며 "평생을 노력했는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며 당혹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