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일의 하바로프스크 역사 기행 - 제정러시아의 동방정책과 항일 독립운동 역사가 얽힌 아무르강 도시
김원일의 하바로프스크 역사 기행 - 제정러시아의 동방정책과 항일 독립운동 역사가 얽힌 아무르강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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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2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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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주로 살다 보니, 극동 하바로프스크는 첫 방문이다. 비행기로 7~8시간 걸리는 극동 러시아를 특별한 이유가 없이 오가기는 쉽지 않다. 마침 '하바로프스크 전범재판(Хабаровский процесс):역사적 의미와 현대의 도전'이라는 국제학술대회에 초청을 받아 지난 5일 하바로프스크로 날아갈 기회가 생겼다. 

하바로프스크의 거리 풍경

첫 인상은 분명 러시아였다. 눈에 보이는 건물 장식이나 아파트, 도로 풍경은 물론,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나 커다란 기념물 등은 러시아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지만, 모스크바와는 살짝 달랐다. 모스크바가 '유럽속의 러시아'라면, 하바로프스크는 '아시아속의 러시아'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의 랜드마크는 역시, 도시를 따라 흐르는 거대한 황토빛 아무르 강이다. 중국과의 국경을 가르는 아무르 강은 하바로프스크의 젖줄이 되고, 시민들에게는 휴식과 힐링을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다. 하바로프스크는 17세기 이곳을 탐험한 에로페이 하바로프의 이름을 딴 도시다. 19세기 중반부터 100년 이상 극동지역의 산업및 문화 중심지였다. 소련의 태평양함대 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가 외부 사람들에게 개방되기 전까지, 하바로프스크는 극동 러시아의 최대 도시였다. 이제는 태평양을 끼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행정및 산업 중심지 역할을 넘겨 주었지만, 아직도 인구가 60만 명을 넘는다. 러시아 5,000 루블짜리 지폐에 나오는 아무르강 다리와 해안 절벽, 니콜라이 무라비오프 기념비 등지로 여전히 관광객이 몰린다. 

필자가 묵은 영빈관, '파루스 호텔' 전경

필자가 묵은 곳은 하바로프스크의 유일한(?) 5성급 호텔 '파루스'('돛대'라는 뜻)다. 소련시절부터 하바로프스크를 찾은 외국 방문객들은 국영호텔 인투리스트에 묵었다. 이번 학술대회 참석자들도 대부분 인투리스트 호텔에 투숙했다. 필자를 포함해 10여명만 주최측의 특별한 배려로 파루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전통적인 러시아 귀족의 저택 분위기를 풍기는 4층 건물의 파루스 호텔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학술대회 담당자에 따르면 이 곳은 소련시절 (외지에서 온) 귀빈들이 묵는 영빈관, 즉 특급호텔이었다. 러시아 방문길에 오른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이 곳을 숙소로 선택했고,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과 세계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 등이 귀빈 숙박객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같은 역사를 살리는 마케팅을 펼치면, 호텔의 수익 창출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담당자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아무르 강변으로 이어지는 파루스 호텔 뒷 정원

아무르 강변의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덕분에, 아침마다 강변공원 산책이 가능했다. 호텔 뒷편의 정원도 아름답지만, 그곳에서 보는 아무르강의 뷰는 최고였다. 호텔 안으로 들어서면, 곳곳에 자리잡은 미술 작품들과 조각상 등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객실은 100개가 채 안된다.

파루스 호텔의 내부

'하바로프스크 탐방'은 학술행사 주최 측에서 준비한 버스 투어와 개인 관광으로 이뤄졌다. 버스 투어는 하바로프스크 최고의 휴식처인 아무르 강변과 디나모 공원 등 몇몇 힐링 명소는 생략하고, 역사적 장소를 중심으로 약 1시간 반 가량 진행됐다. 러시아의 어느 도시를 가든, 쉽게 만날 수 있는 2차대전 승전기념공원과 사회주의 혁명 영웅을 기리는 상징물, 러시아 정교회 성당 등을 주로 둘러봤다. 

특이한 것은 2차대전 승전기념공원의 조형물이다. 마치 벽을 여러 개, 혹은 책장을 여러 개 겹쳐 세운 듯한 모습이다. 그 벽면엔 2차 대전 때 순직한 하바로프스크 출신의 2만여 참전용사들의 이름이 빽빽히 적혀 있다.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친 애국시민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함께 보는 이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조형물이다.

2차 대전 승전기념공원의 거대한 조형물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그 앞에 삼면 벽과 함께 설치된 '지구본' 조형물에는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전사한 하바로프스크 출신의 병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기념공원은 승전 30주년을 맞은 1975년 처음 조성된 뒤 10년 후인 1985년과 1995년, 가장 최근에는 2003년 보수및 보완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구본 조형물

승전기념공원과 가까운 언덕위에 높이 선 구세주-변용 성당(Спасо-Преображенский собор)은 하바로프스크의 랜드마크나 다름없다. 햇볕에 반짝이는 황금색 돔은 도시 어디에서나 눈에 들어올 정도다. 러시아에서는 모스크바의 구세주 대성당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삭 성당과 함께 규모 면에서는 '3대 성당'으로 꼽힌다고 한다. 높이가 95m에 이른다.

구세주-변용 성당(Спасо-Преображенский собор) 

하바로프스크 대성당은 2001~2004년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세워졌다. 성당 옆에는 30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당초 승전 30주년에 맞춰 승전기념공원과 함께 세워졌으나, 새로 건축된 대성당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난 2004년 다시 만들었다.

대성당과 오벨리스크

버스 투어중 거리 한 복판에서 탱크를 만났다. 관광안내인의 설명으로는 2차 대전에서 활약했던 소련제 탱크다. 원래 대 중 소 3가지 크기로 제작됐으나, 현재 전시된 탱크는 중형 탱크라고 했다. 옆자리의 러시아 학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에서 같은 탱크가 전시되어 있었다"고 귀띔했다. 

2차대전때 활약한 소련제 탱크

하바로프스크에는 그 곳에서 활약한 역사 속 인물들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 여럿 있다. 또 건물이나 아파트 벽에는 유명 인사의 존재를 알리는 명패들이 걸려 있고, 거리 곳곳에는 역사를 기념하는 동판이나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러시아의 다른 도시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하바로프스크를 거닐며 이같은 명패들이나 조형물 등을 살펴보는 것은 하바로프스크를 빛낸 역사적 인물들을 찾아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다. 

사할린에서 태어났으나 하바로프스크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곡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표지판
한인 출신의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가 알렉산드라 김-스탄케비치
기념비
하바로프스크 시의 근대화에 앞장선 시당위원장 알렉세이 초르니 기념 동판 

파루스 호텔의 건너편에는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대로'가 뻗어 있다. 하바로프스크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광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다. 동시베리아의 총독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무라비요프 총독은 19세기 러시아의 극동 영토 확장에 큰 역할을 해낸 인물이다. 

1847년 니콜라이 1세에 의해 동부 시베리아 총독으로 파견된 그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 영토가 된 아무르강 지방의 탈환을 목표로 삼은 뒤 크림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군에게 공격당한 캄차카 지원을 구실로 아무르강 유역을 점령했다. 이후 '태평천국의 난'으로 고통받는 청나라를 협박해 아이훈 조약을 맺고 아무르강 이북 지역을 돌려받는 데 성공했다. 그 공적으로 그는 아무르스키라는 백작 작위를 받았다.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동쪽으로 더 발을 뻗쳐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마저 장악했다.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대로는 한마디로 역사의 거리다. 약 1시간 반 정도, 이 대로를 둘러보니, 거의 모든 건물의 1층 벽면에는 각종 기념 동판들이 붙어 있다. 건물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내용들이 많았다. 하바로프스크에 역사적 사건도 그리고 역사 속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도 많았다는 뜻이다.  

김유경 거리의 79A 주소 앞에 선 필자 

눈길을 끈 하바로프스크의 거리는 전설적인 항일 독립 영웅 '김유경 지사'를 기린 '김유경 거리'다. 하바로프스크 도심에 있는 '김유경 거리'는 1930년부터 불리기 시작했는데, 좁은 골목 정도가 아니라, 널찍하고 길게 뻗은 대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유경 지사'는 아직 우리 학계에서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러시아 발음으로 김유경, 김유정, 김유천 등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로선 김유경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필자:김원일(모스크바대 정치학박사, 전 민주평통 모스크바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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