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일의 예카테린부르크 기행) 옐친 박물관과 레닌 동상, '피의 성당'을 함께 간직한 역사의 현장
(김원일의 예카테린부르크 기행) 옐친 박물관과 레닌 동상, '피의 성당'을 함께 간직한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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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0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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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제교류재단(KF) 모스크바 사무소(소장 임철우)가 마련한 '2021 KF 한국학 순회 특강' 프로그램에 따라 지난달 중순(14~18일) 우랄 지역의 중심지 투멘과 예카데린부르크를 잇따라 방문했다. 아직 겨울이 시작되지도 않은 늦가을이었으나, 그 곳은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고, 낮 기온이 영하 10도로 떨어졌다. 모스크바에서 오래 거주해온 필자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날씨였다. 대신, 시베리아의 거친 호흡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예카테린부르그의 우랄연방대학 특강 모습

예카테린부르그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우랄산맥의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대도시다. 러시아를 구성하는 우랄 연방관구의 핵심 지역인 스베들로프 주(州)의 주도다.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하루 밤낮을 달리면 닿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러시아 초대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의 고향이고, 산업의 중심지라는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예카데린부르크 시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예카테린부르크를 방문해야 하는 3가지 이유'라는 코너가 눈에 띈다. △아시아와 유럽이 나뉘는 경계 지점이고, △산업 및 기계 공학의 중심 지대이며 △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곳이라는 게 그 이유다.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경계 표시 상징물. 왼쪽이 아시아, 오른쪽이 유럽이다/사진출처:예카테린부르크 시 홈페이지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표지석(상징물)은 예카테린부르크의 도심에서 불과 17km 떨어진 곳에 서 있다. 2004년 8월에 세워진 이 상징물을 찾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신종 코로나(COVID 19) 사태 이전에만 해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우랄산 금속은 19세기에 세계 최고로 꼽혔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에도, 런던의 대영제국 국회의사당 지붕에도,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에도 이곳 금속이 사용됐다고 한다. 또 국제 인형극 축제인 '페트루쉬카 그레이트'(Петрушка Великий)을 비롯해 세계 서커스 축제, '박물관의 밤' (Ночь музеев) 행사(5월), 독특한 거리 예술 축제인 '스테노그라피야'(Стенограффия, 7월) 등이 관광객을 부른다.

하지만 러시아의 겨울은 '실내 문화'의 계절이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고, 극장에서 예술 공연을 즐기는 시즌이다. 연말이 가까워 오면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찾는 신도들의 발길도 잦다.

옐친 센터 모습(위)와 옐친 대통령 박물관/사진출처:예카테린부르크 시 홈페이지

예카테린부르크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에 많이 찾는 곳은 옐친 박물관과 '피의 성당'이었다.

옐친 박물관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장 현대식 빌딩인 33층짜리 비즈니스 센터 '데미도프'와 거의 붙어 있는 '옐친 센터' 2층에 자리잡고 있다. 내부에는 옐친을 신격화, 영웅화한 것은 아닌가 싶을 만큼 옐친 개인을 찬양하는 전시물로 가득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70년 소련 공산체제를 끝내고 러시아 민주화 시대를 연 옐친 대통령을 지지하는 한 여성이 “보리스 (옐친), 네가 옳아”(Борись. ты прав!) 라고 쓴 피켓을 든 커다란 사진이 방문객을 반긴다. 비슷한 사진들은 전시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보리스 (옐친). 네가 옳아"라고 쓴 피켓을 든 여성 사진
박물관 내부의 옐친 대통령 사진

옐친 박물관은 몇 개의 작은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전시실에선 3D 애니메이션 동영상이 매우 큰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이 영상은 약 10분간에 걸쳐 러시아의 긴 역사를 개괄해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옐친이 1991년 소련 보수세력의 쿠데타군 탱크에 홀로 맞서는 모습이다.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해방자'로 옐친을 추켜세우고, 찬양하는 듯하다. 

3D 동영상의 마지막 장면. 옐친 대통령이 쿠데타군 탱크앞에 홀로 서 있다 

현지 방문객들은 이 동영상을 거의 보지 않거나 잠깐 본 뒤 지나갔지만, 필자는 두 번이나 지켜봤다. 3D 동영상이 놀라울 정도로 실감나게 잘 구현됐고, 고대로부터 제정러시아, 소련 공산체제를 거쳐 러시아의 새로운 탄생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짧으면서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장면들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방에서는 그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활동하던 시절과 모스크바의 중앙 무대로 진출한 후 활동,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시기의 모습들을 보여줬다.

옐친 대통령의 재현된 크렘린 집무실. 사임 의사를 천명하는 '2000년 (국민에게 보내는) 새해 인사'를 촬영했다. 촬영 카메라와 브라운관 TV도 보인다.

마지막 전시실에는 그의 크렘린 집무실을 재현해 놓았다. 옐친 대통령이 전격 사임을 발표한 '2000년 새해 인사'를 촬영했던 바로 그 집무실이다. 그는 새로운 밀레니움(1,000년)의 시작을 눈앞에 둔 1999년 12월 31일 집무실에서 퇴진 의사를 담은 '새해 인사'를 촬영했다. 그 장면을 촬영한 카메라도 그대로 있고, 사임을 알리는 인사말도 낡은 브라운관 TV를 통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시실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빈 의자에 홀로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실물 크기의 옐친 동상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와 나란히 앉아 사진 한장을 남겼다.

옐친 대통령과 함께

예카테린부르크의 또 다른 역사적 명소는 '피의 성당'이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짜르(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이 비극적 최후를 마친 곳에 세운 성당이다.

1917년 10월 러시아 대혁명의 불길에 에카테린부르크로 쫓겨난 니콜라이 2세는 이듬해 7월 어느 여름날 밤, 볼쉐비키들에 의해 전격 처형됐다. 사형 선고를 내리는 법적 절차도 깡그리 무시됐다. 그래서 소련 당국은 오랫동안 니콜라이 2세과 그 가족들의 처형 사실을 비밀에 부치거나, 거짓 정보로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애써 막았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된 뒤 니콜라이 2세의 처형에 대한 진실은 세상에 알려졌고, 그와 가족들의 시신이 묻힌 장소도 발견됐다. 우여곡절 끝에 니콜라이 2세는 소련의 정치적 피해자로 인정되고, 복권됐다. 러시아 정교회 측은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고, '마지막 짜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처형된 장소에 '피의 성당'을 세웠다. 

매우 큰 규모의 '피의 성당'은 러시아 여느 정교회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성인들과 성서속 사건들을 담은 벽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피의 성당 내부 모습
'1918년 7월 17일 밤 이 곳에서 니콜라이 2세가 순교했다'는 안내글이 붙어 있다.
피의 성당 내부, 관 앞에서 추모하는 러시아인들
예카테린부르크의 '피의 성당' 앞에 선 필자

특이한 것은 성당 안쪽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관이다.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죽음을 상징하는 관이라고 한다. 그 관 앞에서 참배하고 묵상하는 몇몇 러시아 인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성당 한켠에는 짜르의 가족을 기념하는 박물관도 있다.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의 일상생활을 담은 유물들이 주로 전시돼 있다. 

'피의 성당'을 둘러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소련의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시작할 때부터 죄 없는 황제의 아이들을 살해한 그 순간부터 이미 그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는 한 역사학자의 이야기다. 

예카테린부르크 시 청사앞 광장에 우뚝 서 있는 레닌 동상

‘역사와의 공존'이란 말은 러시아의 이곳 저곳을 다닐 때마다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단어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청과 시의회가 자리 잡은 중앙광장에는 큼직한 레닌 동상이 서 있다. 70년 소련 공산체제를 무너뜨린 옐친 대통령의 고향 예카테린부르크 중심에 아직도 소련의 '국부'인 레닌의 동상이 서 있다니, 이게 바로 '역사와의 공존'을 택한 러시아식 문화 의식이 아닌가 싶다.

글 사진: 김원일 모스크바대 정치학박사, 전 민주평통 모스크바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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