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러시아에서는- 2) 우크라 위기의 씨앗을 뿌린 고르바초프-옐친의 크렘린 싸움
그때 러시아에서는- 2) 우크라 위기의 씨앗을 뿌린 고르바초프-옐친의 크렘린 싸움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1.12.11 0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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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목격 나자르바예프 카자흐 전 대통령 "난 소련 대통령" vs "그 자리에 곧 앉겠다"

꼭 30년 전(1991년) 12월은 소련제국의 흥망을 가르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그해 12월 8일 소련연방을 구성해온 러시아공화국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공화국과 벨라루스공화국을 끌어들여 새로은 연방 창설을 위한 '벨로베슈스카야 합의' 를 이끌어 냈고, 21일에는 카자흐스탄공화국 수도 알마티에서 '독립국가연합(CIS)'의 결성을 선언했다.

그 해가 끝나기 전(25일) 옐친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크렘린에서 쫓아냄으로써 '소련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1917년 역사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으로 출범한 소련제국이 한달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러시아 혁명 발발 74년만이다. 세계사의 긴 흐름에서 이 기간은 잠깐 반짝한 '공산당 시대'로 기록될 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긴박했던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생존한 나자르바예프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다.

나자르바예프 전카자흐 대통령 증언을 전한 현지 매체 가제타루 웹페이지/캡처

나자르바예프는 CIS 결성을 선언하는 장소를 제공한 당사자다. 소련연방 소속 카자흐스탄공화국 공산당 제1서기(정부 수장)에서 공화국 대통령으로 변신한 뒤 독립한 카자흐스탄의 초대 대통령을 지내다 지난 2019년 퇴임했다. 그러나 여전히 '카자흐스탄의 국부'로 추앙되며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전하는 당시 비화중 하나는 옐친과 고르바초프가 연방의 존속 여부를 놓고 다툰 싸움이다. 가제타루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나자르바예프는 나일리 아스케르-자드 감독의 다큐필름 '연방 탈퇴 30년'(в фильме Наили Аскер-заде '30 лет без Союза')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그 다큐는 러시아 TV채널 '러시아-1'을 통해 안방에 전해졌다. 

나자르바예프는 옐친으로부터 '벨로베슈스카야 합의' 서명식에 초대됐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서명을 거부하고 이튿날 고르바초프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약속된 시간에 크렘린에 들어가 고르바초프와 만나 대화를 시작할 즈음, 옐친이 방으로 들어왔다.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옐친 박물관'에 걸린 옐친/바이러 자료사진 

고르바초프는 그를 향해 (벨로베슈스카야 합의에 대해) "도대체 당신은 무슨 짓을 했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게 뭡니까?"라고 날카롭게 물었다. 또 "그렇게 될 경우 핵무기와 연방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압니까?"라고 쏘아붙였다. 

옐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지금 심문하는 겁니까?"라고 반박했다. 고르바초프는 "심문이 아니라 묻는 거다. 하지만 대답은 해야 한다"고 채근했으나, 옐친은 "답변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옐친에게 "난 여전히 소련의 대통령"이라고 했고, 옐친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나중에 고르바초프의 자리에 앉겠다고 말했다. 나자르바예프는 “그때 큰 소리로 욕설이 오가고 충돌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현지 언론 가제타루는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싸움을 전하며 세르게이 샤크라이 Сергей Шахрай) 전 옐친 대통령 고문이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서 소련 붕괴의 책임을 고르바초프에게 돌린 사실을 거론했다. 샤크라이는 인터뷰에서 "1991년 가을에는 이미 소련을 구할 기회가 사라졌다"며 그 이유로 소련 공산당의 급속한 붕괴를 들었다. 고르바초프가 1991년 10월 1일 소련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가제타루는 샤크라이의 이런 시각이 옐친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늬앙스다. 

'벨로베슈스카야 합의'의 문안 작성및 서명에 참석한 벨라루스공화국의 스타니슬라프 슈스케비치 공산당 제1서기는 당시 말없이 술(브랜디)만 마셨다고 나자르바예프는 회고했다. 그는 그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어떤 환상에 취해 있었는 같았다"고도 했다. 

고르바초프 전대통령. 다큐 '고르바초프, 낙원'의 장면 중 캡처

CIS 결성 나흘 뒤인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했다. 소련제국은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았다. 

소련의 붕괴를 촉발한 것으로 여겨지는 '강경보수파 쿠데타' 30주년(8월 19일)을 맞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소련) 연방의 종말을 선언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3국 지도자들의 '벨로베슈스카야 합의' 이후, 쿠데타 세력은 '나라(연방)을 보존하기 위해 나섰던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그들의 모험은 그 결과가 파멸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또 "소련 연방이 살아 남았더라면,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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