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러시아에서는 -3)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과 함께 삶의 뿌리가 뽑혔다?
그때 러시아에서는 -3)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과 함께 삶의 뿌리가 뽑혔다?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1.12.27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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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12월 25일 모스크바 크렘린에는 낫·망치 문양의 소련기가 내려오고 3색의 러시아기가 게양됐다. 동시에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사임 연설과 함께 크렘린을 떠났다. 그 자리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차지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소련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인 고르바초프는 25일 타스통신과의 회견에서 "(소련의 붕괴를 촉발한) 8월의 보수강경타 쿠데타 이후에도 소련은 다른 형태(주권 국가 연합)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새 형태의 국가연합은 외교적으로는 유엔에서 소련의 지위를 이어받고 국방(핵무기 포함), 교통및 통신 네트워크, 단일 통화, 인권 보장 등의 권한을 유지하되, 나머지 대부분의 권한은 각 공화국에게 이전하는 체제라고 그는 회고했다.

벨로베슈스카야 협정 체결 모습. 오른쪽 두번째 앉은 이가 옐친 대통령/사진출처:위키피디아

그러나 소련을 구성한 핵심 3개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수장들이 12월 8일 벨라루스의 '벨로베슈스카야 다차(별장)'에 모여 독립국가연합(CIS)의 출범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고르바초프 식 국가연합의 꿈은 사라졌다. 이 협정은 12월 12일 러시아 의회에서 통과됐다. 러시아가 이날을 제헌절로 기념하는 이유다. 

고르바초프는 "소비예트 연방(소련)의 민족 문제를 간과한 게 불찰이었다"며 "자신이 대통령직을 사임하지 않았다면, 심각한 (민족·국가간) 내전을 초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서둘러 대통령직을 내려놓지 않았으면, 소련이 다른 형태로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정면 부인한 것이다. 

고르바초프, 소련은 주권국가연합으로 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얀덱스 캡처
이제는 완전히 잊혀진 소련국기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인 안드레이 란코프(58) 국민대 교수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르바초프의 주장에 사실상 동의했다.

란코프 교수는 30년 전을 회고하면서 "당시 내전과 같은 심각한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며 "생각보다 혼란이 크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핵무기 관리와 국경선 유지 등 올바른 결정 몇 가지를 했다"고 평가했다. "그때 만약 국경선을 바꾸기로 했으면, 15개 공화국이 서로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라고 되돌아봤다. 그러나 그때의 올바른 결정이 30년 뒤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설' 같은 위기를 부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련은 '벨로베슈스카야 협약'으로 숨통이 끊어졌지만, 사망의 근본 원인은 경제문제에 있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1990년, 1991년 모스크바 출장시, 현지 경제상황은 참담함 그대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반이 텅 빈 국영상점 앞에는 남은 물건이라도 챙기기 위해 긴 줄을 섰고, 제대로 된 화장지가 없어 호텔에서도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란코프 교수는 "소련은 인공위성을 만들었지만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었다. 이게 바로 소련이 무너진 이유"라며 "국민들은 일상의 경제 생활에 불만이 많았고 1980년대 말부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그는 "공산주의는 노동과 자본을 총동원해 10년, 20년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지만, (생산성 향상에 기반한) 지속 가능한 성장이 아니라는 데 근본 문제가 있었다"며 중국은 현재 붉은 색(공산당)을 칠한 자본주의 국가로 규정했다. 1980년대 초부터 개혁개방을 했고, 공산주의는 간판일 뿐이었다는 것. 

피커링 전 주러 미국대사:소련붕괴는 막을 수도 있었다/얀덱스 캡처

주러시아 대사를 지내 미국에서 소련전문가로 꼽히는 토머스 피커링 전 대사도 러시아 타스 통신과 만나 "소련 붕괴는 당시 워싱턴을 놀라게 했다"며 "경제 분야에서 시기적절한 의사 결정을 했다면 그러한 사태(붕괴)로의 전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1989~1992년 주 유엔대사로 소련의 붕괴 과정을 지켜봤고, 이후 1993~1996년에는 주 러시아대사로 극도의 혼란기를 현지에서 겪었다. 

피커링 전대사는 "미국이 소련의 붕괴를 예측했느냐"는 질문에 "그 때(주 유엔대사)는 미국도 고르바초프의 소비에트 연방이 실제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믿었다"며 "흔들리지 않는 내부 단결의 기반을 갖고 있었으나, 그런 소련을 흔든 건 경제적 비효율성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의 목표 달성이 경제적 효율성보다 훨씬 더 중요했고, 결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든 못하든 경제적 비효율성으로 인한 비용이 엄청나 모든 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또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 벌이는 바람에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도 했다. 

소련의 붕괴후 옐친 대통령이 1992년 벽두에 전격 도입한 시장경제체제는 러시아에서 '삶의 뿌리'를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당시 상황은 푸틴 대통령의 회고에서도 짐작 가능하다. 그는 지난 12일 국영TV 채널 '러시아-1'의 제헌절 특집 프로그램 '러시아 현대사'에서 '소련 붕괴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였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소련 붕괴는 비극이었다"며 "달빛 아래서 택시를 몰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크렘린 집무실의 푸틴대통령(위)와 옐친 대통령이 사임 성명을 발표한 당시 집무실 풍경(옐친 박물관 재현)/사진출처:크렘린.ru 바이러시아 자료 사진(김원일 제공)
예카테린부르크 옐친 박물관에 걸려 있는 옐친 대통령 사진/바이러 자료 사진(김원일 제공)

그는 "가끔은 돈을 더 벌어야 했고, 그래서 개인 자동차로 택시 운전사 일을 한 것"이라며 "솔직히 이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쾌하지만, 불행하게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제대로 월급을 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차로 무허가 택시 영업에 나섰다. '우버 택시'의 오리지널 판이나 다름없었다. 모스크바의 어디서든, 도로가에 서서 손을 들면 개인 자동차가 다가와 "어디?"라고 물었다. "어디까지, 얼마"라고 제안하면 그냥 떠나기도 하고, 흥정이 붙기도 했다. 최소한 3~4대 중 한대는 방향이나 가격이 맞아 '택시 처럼' 탈 수 있었다. 

란코프 교수도 대통령의 개인 택시 운전에 대해 "그래도 그는 운이 좋은 편이다. 자가용을 갖고 있지 않았느냐"고 했다. 당시 그는 거리에서 녹음기 도매장사를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장사) 실력이 없어 성공하진 못했다"며 "당시에는 조직폭력배들이 판을 쳐 시장 상인들이 문제가 생기면 경찰 대신 조직폭력배를 찾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소련 붕괴 후 10년 가까이 공권력을 대신하다시피 했던 러시아의 마피아 조직은 푸틴 대통령이 집권과 함께 강력한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길거리에서 사라졌다. 1990년, 1991년 만큼은 아니지만, 밤 늦게 모스크바의 뒷골목을 큰 걱정없이 다닐 정도는 됐다는 평가다. 

푸틴 대통령 90년대에 미 CIA 협력자들이 옐친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밝혀/얀덱스 캡처

푸틴 대통령은 "소련의 붕괴로 역사적으로 '러시아'(제국)로 불린 (당당한) 나라는 영토의 40%와 그와 비슷한 규모의 산업 인프라와 노동력(국민)을 잃었다"며 "우리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고, 무려 천년에 걸쳐 만들어졌던 (러시아의) 역사가 상당히 상실됐다"고 말했다.

그의 역사관은 현재의 국제정세를 보는 시각과도 연결된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23일 연말 대규모 기자회견에서 "미국 전문가들은 (소련 해체 직후인) 1990년대에 (핵무기 폐기를 위해) 우리의 핵무기 시설에서 일했고, CIA 인사들도 러시아 정부에서 고문을 맡았다"며 "(미국은 러시아에서) 무엇이 더 필요한가? 왜 북카프카스의 (체첸) 테러조직을 지원했나? 나는 정보기관 FSB(KGB의 후신) 출신이어서 (그때 일을) 잘 알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을 통한 그의 표현은 더욱 신랄하다.
"연방보안국(FSB) 국장 시절(1998~1999년), 서방의 일부 세력이 러시아 연방을 붕괴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러시아를 흔들려는 분리주의자들, 폭력조직들, 테러리스트들을 직접 지원하는 것을 봤다", "1990년 중반 우리 정부에서 일한 고위 관리가 나중에 CIA 요원으로 확인됐다. 이는 러시아 내정에 간섭하려는 시도다", "우리(정보기관)는 이중 스파이들과도 함께 일했다. 그들(미국 전문가들과 CIA)이 한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1990년대 러시아의 혼란을 틈타 서방 측이 러시아 연방마저 해체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토의 확장으로 러시아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는 불안 심리의 근저에는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다.

'거대한 땅을 지녔다'는 이유로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기보다는 침공을 당해왔다(나폴레옹과 히틀러)는 현지 역사학자들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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