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일의 모스크바 이야기) 12월의 화두는 '고려인의 뿌리를 찾아서'
(김원일의 모스크바 이야기) 12월의 화두는 '고려인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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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2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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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 시대 고려인 저술 출판 기념회 잇따라 - '온갖 잡동사니' '타올로라 타올라라 내 별이여' '고려인은 누구인가' 등

'고려인의 뿌리를 찾아서'

2021년을 마무리하는 12월, 모스크바에선 고려인 사회의 뿌리를 찾아가는 행사들이 비교적 잦았다. 신종 코로나(COVIG 19)로 겉으로 드러나는 고려인 사회의 활동은 크게 위축됐으나 내면적으로는 '고려인은 어디서 왔는가? 고려인은 누구인가'라는 명제에 천착하는 작업들이 적지않았다. 고려인 (사회)을 다룬 책들의 출판 기념 행사들이었다.

기념 행사에 빠짐없이 초청된 필자는 이들 서적이 앞으로 러시아와 고려인 동포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그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시작은 고려인 원로 언론인 블라디미르 리(75) 선생의 자전적 저서(회고록) '온갖 잡동사니'가 끊었다. 출판 기념 행사는 지난 9월 말 모스크바 시립 민족회관에서 열렸다. 블라디미르 리 선생은 대학 졸업 후 법무부 고위공무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언론인과 시민사회 활동가로 고려인 동포의 권익 보호와 한러 교류협력 확대에 힘쓰고 있는 분이다.

'온갖 잡동사니'를 펴낸 원로 언론인 리 블라디미르(왼쪽)와 행사 사회를 맡은 김 모이세이 고려인연합회 고문단 의장

회고록 '온갖 잡동사니'은 제목 그대로 리 선생 본인이 러시아(소련)에서 살아온 이야기와 고려인 저명 인사, 사건 사고, 보통 사람들의 애환 등을 바탕으로 고려인 동포들의 삶과 운명, 전통 및 관습, 생활방식 등을 담았다.

특히 이 책은 △칼리닌그라드 지역 고려인 지도자 스타니슬라브 임 △노동영웅으로 추앙받는 블라디미르 박 △알타이의 저명 시인 알렉산드르 박 △세계역도 챔피언 블라디미르 한 △세계적인 리듬체조선수 밀레나 안 △세계댄스 챔피언 아나스타샤 김 등 한국에는 덜 알려진 고려인들을 소개했다. 

리 겐나디 선생 추모집 '타올라라 타올라라 내 별이여' 출판 기념식 모습

지난 10일에는 유서깊은 모스크바의 '5월1일 도서관'에서 구소련 문화부 고위 관료이자 문학가, 번역가 그리고 성악가이기도 했던 리 겐나디 바실리예비치(1935~1996년) 선생의 25주기 추모 문집 '타올로라 타올라라 내 별이여'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1935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리 선생은 곧바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됐으나 모스크바국립대를 졸업한 뒤 문화부(모스크바 레닌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그네신 음대에서 성악을 공부하는 등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한 '고려인 사회'의 큰 별로 존경을 받은 분이다. 주변의 많은 고려인들과는 달리, 한국어 선생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한국어를 잘 구사해 한러 수교 과정은 물론, 수교 후에도 양국의 교류및 관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은 지난 1995년으로, 당시 61세였다. 그리고 25년이 지나 리 선생을 추모하는 문집이 김 모이세이 고려인연합회 고문단 의장을 중심으로 출간됐다. 추모 문집에는 리 선생과 함께 했던 동료, 친구, 가족 등이 그를 회고하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출간을 주도했던 김 의장은 기념식에서 “리 선생은 매우 신실한 친구이자 동료였다"며 "비교적 짧은 삶을 살았지만, 다방면에 거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추모했다.

동료들의 기억과 추모 문집에 따르면 리 선생은 뛰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1990년 한소(러시아)수교 당시 소련 외무부로 파견을 나가 막후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때 한국쪽 정재계 고위인사들과도 많은 친분을 쌓았다.

추모집 속의 들어 있는 '한소수교 후 한국 방문 모습' 사진. 한소 외교협상에 참석해 대화를 이끌고 있다. 태극기와 소련기가 눈에 띈다. 
전설적인 고려인 성악가인 남 루드밀라(왼쪽)와 자리를 같이한 리 겐나디 선생. 오른쪽은 부인.  

리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으나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카자흐스탄 대초원으로 강제이주했고, 이후 아버지의 직장(국제문학출판사 Издательство международной литературы)을 따라 모스크바로 왔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한 그는 모스크바에서 '쉬꼴라'(초중등 교육기관) 마친 뒤 명문 모스크바국립대학에 들어갔다. 졸업 후 배치된 첫 직장은 소련 문화부 산하 레닌도서관 국제부였다.

그는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1957년 그네신 음대 야간부에 들어가 성악을 전공했다. 졸업시험은 차이코프스키 오페라 '에브게니 오네긴'의 '렌스키 아리아'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상대 오네긴의 역은 맡은 이가 바로 그 유명한 '백학' 가수인 요시프 코브존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한소 관계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79년 학술저널 '소련 서지학'(書誌學, Советская библиография)의 선임 편집자로 일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저널 문제로 해외와 교류가 잦으면서 한-러시아 통번역을 맡았다는 것. 나중에는 북한 노동당과 북한 정부의 행사에도 통역으로 여러 번 참석했다. 

그의 러시아 아내 타티아나 즈베레바는 "그때부터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늘 아픔을 느꼈고, 남북한의 자료와 정보를 열심히 모았다"고 회고했다.

리 선생은 또 소련 고려인 사회의 권익 보호를 위해 재소 고려인 협회의 창설및 활동에도 앞장섰다. 전소련고려인협회(Всесоюзной ассоциации советских корейцев)과 러시아고려인협회 등이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또 고려인들의 역사, 운명에 관한 라디오와 TV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1990년에는 '세계 스포츠및 민족 축제'에 참석하는 고려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가기도 했다. 

한소수교 전에는 모스크바에 온 한국외교관과 그 가족들을 위해 모스크바와 수도권을 돌아보는 탐방 프로그램을 만들고, 민간 외교의 일환으로 기업인과 문화예술계 종사자, 과학자, 교육자들의 양국 협상에 적극 참여했다. 또 고(故) 허진 전 러시아 고려인협회 회장과 함께 한소수교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또 '한인 디아스포라'의 중요성과 전통을 널리 알렸다. 우리의 전통 명절(설날, 추석)과 국경일(광복절)을 챙기고, 한국학교및 대학 설립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모스크바에서 '고려인 신문'(고려일보, 구 레닌의 기치)의 발행을 주도했다. 

추모집 출판 기념식에는 생존한 리 선생의 부인과 동생 등 가족들도 참석했다. 러시아인 부인은 "선생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했을 때, 한국 문화와 정서를 모두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며 "내 선택이 옳았음을 나중에 깨달았다"며 행복했던 결혼 생활을 회고했다.

'고려인 뿌리찾기'의 하일라이트는 역시, 지난 21일 열린 '고려인은 누구인가' 출판 기념식이다. 이 책은 사할린 출신으로 구소련 연방의원을 역임한 김영웅 극동연구소 선임연구원와 김 모이세이 의장, 타스통신 기자 출신의 텐 발렌틴 고려인신문 편집장 등이 집필에 참여했다. 

'고려인은 누구인가' 집필자들. 사진 왼쪽부터 텐 발렌틴 고려인신문 편집장, 안드레이 베레진 러시아민족회관  관장, 한사람 건너 김 모이세이 고려인연합회 고문단 의장

저자들은 각각 △한국과 고려인 동포 역사 △고려인동포 문화 △고려인 동포사회를 빛낸 인물들을 맡아 집필했다. 고려인 동포들이 어떻게 러시아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고려인 동포들이 한민족 문화를 러시아 땅에서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왔는지 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앞으로 국내에서 고려인 동포나 한러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실적으로 소련에서 활약했거나 현재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고려인들을 찾으려면 이 책을 열어보면 된다. 

'고려인은 누구인가' 출판기념회에 참석자들. 왼쪽 줄 앞에서 4번째가 필자

행사에 참석한 필자는 한러 관계가 현재처럼 발전하기까지는 리 겐나디 선생과 같은 많은 고려인들의 크고 작은 기여가 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한국 정부가 앞으로 고려인 동포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그간의 노력에 보답하고 위무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글 사진: 김원일 모스크바대 정치학박사, 전 민주평통 모스크바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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