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러시아에서는 -5) 눈물로 보낸 모스크바의 첫해 연말, 그리고 사라예보의 추억
그때 러시아에서는 -5) 눈물로 보낸 모스크바의 첫해 연말, 그리고 사라예보의 추억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2.01.07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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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큰 관심이 없지만, 발칸반도의 '최대 화약고'라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에 주둔 중인 유럽연합(EU) 평화유지군(약 600여명)의 활동이 지난 연말 1년 더 연장됐다. EU 평화유지군은 지금부터 30년 전인 1992년부터 4년간 20만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낸 보스니아 내전을 종식한 ‘데이턴 평화협정’의 이행및 준수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시 내전에 개입한 나토군으로부터 2006년 그 임무를 이양받았다.

'데이턴 평화협정'이 체결된 1995년 12월, 필자는 모스크바에서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해 연말을 사라예보에서 보냈다. 그 곳에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 전문요원인 송혜란씨가 보스니아의 정세분석을 담당하고, 민병석 전 체코대사가 PKO 크로아티아 단장으로 1만5천여명의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관장하며 역내 평화유지를 책임지고 있었다. 한국인은 그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사라예보는 우리에게 탁구로 가장 가깝게 여겨지는 곳이다. 1973년 4월 보스니아(당시는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이에리사·정현숙 선수 등이 여자단체전을 처음 우승으로 이끈 가슴 벅찬 도시다. 1984년에는 제14회 동계 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다. 역사적으로는 제 1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사건(1914년 6월)이 발생한 도시이기도 하다.

내전 직후의 사라예보(위)와 현재/사진출처:위키피디아 

보스니아 내전 취재에 나선 필자에게 이런 기억은 너무 한가할 뿐이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사라예보행 PKO 수송기 탑승에 몇차례 실패할 때는 절망감에 울었고, 가까스로 도착한 사라예보 공항에서 맨 먼저 '세르비아계 저격수' 이야기를 들으니 몸과 마음이 다 떨렸다. 저격수 총구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사라예보 상황은 이랬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유고 연방을 구성하던 5개 공화국들도 제각기 독립하겠다고 나섰다. 그중에서 가장 큰 몸살을 앓은 곳이 바로 사라예보를 중심으로 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다. 다수 회교도 주민들과 유고 연방의 핵심인 세르비아공화국의 세르비아계 주민들간에 민족·종교적 충돌이 내전으로 비화한 것. 나토의 강력한 개입으로 내전 발발 4년만에 '데이턴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이미 20만명의 희생자와 수백만명의 피난민이 발생한 뒤였다.

출처:한국일보 웹페이지

우여곡절 끝에 평화협정 합의가 이뤄지자, 국내 언론들도 현지 취재에 나섰다. 그러나 사라예보로 가는 항공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두 끊긴 상태였다. 모스크바에 주재하던 필자는 사라예보 출장 지시를 받고 수소문한 끝에 민 전대사(당시 PKO 크로아티아 단장)와 연락이 닿았다. 사라예보로 바로 가는 길은 자그레브 공항에서 PKO 수송기를 타는 방법외에 없다는 정보를 얻었다. 국내 모 신문은 아드리아해안 쪽에서 육로로 사라예보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나중에야 들었다(사실은 그 신문의 현지 르포 기사를 보고 안 이야기다).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찾아간 자그레브 공항의 PKO 섹터는 조용했다. 명함을 건네고, 사라예보행 수송기 탑승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의외로 흔쾌히 담당 군인(PKO 관계자?)이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줬다. 수송기는 서너시간 후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는 기다리면서 주변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읽어보라고 했다.

자그레브의 공원(카롤 토미슬라바)/사진출처:위키피디아

안내문의 핵심은 수송기 탑승 순서였다. 보스니아 정부 관리들과 PKO 업무 종사자들이 1순위, 평화유지군 병력과 세계적인 언론사 등이 2순위, 뭐 그런 식이었는데, 보통 첫번째, 2번째 순번의 그룹은 탑승에 아무 문제가 없는 듯했다. 한국에서 온 기자는 맨 마지막 4순위. 아무리 먼저 예약을 했더라도 앞 순위의 사람들이 탑승을 원하면 예약한 자리도 빼앗기는 게 그 곳의 원칙. 맨 끝순서의 서러움이기도 했다. 그렇게 2번이나 헛걸음을 친 뒤 3번째 예약만에 탑승에 성공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서로 마주 보게 자리를 배치한, 옛날의 '입석 버스'처럼 만들어진 수송기 좌석에 앉자 옆자리의 친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동양인이 방탄복도 없이 혼자 자리에 앉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민 전대사로부터 방탄복 이야기를 들었지만, 자그레브 어디에서 방탄복을 구하겠는가? 그렇다고 탑승 자체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사라예보에는 무슨 일로 가느냐고 물었다.
"평화협상 취재를 가는데요"
"호텔은요?"
"수송기를 언제 탈 수 있을지 몰라, 예약은 못했어요"
"근데 방탄복도 없이 가요?, 공항에 누가 마중은 나와요?"
"자그레브에서 방탄복을 구할 수가 없어서.. 공항에 내려서 시내로 들어가는 교통편을 알아봐야지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책없는 출장이었다. 그 친구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 길목에 (세르비아계) 저격수가 노리고 있는데, 괜찮겠느냐?"
사라예보 공항에 착륙할 때까지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하루에 수송기 한두대 정도 오르내리는 조그만 사라예보 공항은 썰렁했다. 다들 마중을 나온 듯했다. 힘껏 포옹하는 모습이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과 만나는 것 같았다. 세워진 차량에는 거의 유엔 소속 표시가 붙어 있었다. 한 눈에도 시내로 들어갈 방법이 없을 것 같아 힘이 쭉 빠졌다.

두리번거리고 있는 필자에게 그 친구가 찾아왔다.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같이 타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이게 웬 횡재? 라고 생각하며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모두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갑자기 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차량이 야트마한 언덕배기를 오를 때, 그 친구가 "저격수들이 자주 나타나는 첫번째 장소"라고 알려줬다. 순간, 몸이 움추려졌다. 다행히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저격병이라지만, 어두운 표적을 맞추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사라예보의 대로변에 있는 할리데이 (인)호텔의 후문 쪽에서 내렸다. 대로 건너편이 세르비아계 (민병대) 장악지역이라고 했다. 대로변에 접한 호텔의 정면은 모래주머니로 높게 막아놓았다. 대로 반대쪽의 세르비아계 공격으로부터 호텔 숙박객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사라예보 할리데이 (인)호텔. 대로변쪽이 아니라 뒤쪽(후문)으로 보인다/사진출처:부킹com

나중에 알고 보니, 대로변에 접한 건물들의 뒤쪽은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의 표적에서 벗어난 안전지대였다. 내전 중이라 호텔값이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오늘 하루 무사함에 감사하며 침대에 몸을 눕히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내일부터 뭘 어떻게 취재해서 기사를 쓰나? 답답한 생각도 잠깐,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행히 이튿날 아침에는 호텔 뒤쪽에 죽치고 있는 택시(개인 차량)와 협상(바가지를 썼겠지만)한 끝에 갑싼 숙소와 차량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정말로 대책없는 것은 기사를 송고할 때였다. A4 용지에 손으로 쓴 기사를 서울로 전송(팩스)하기 위해 사라예보 전신전화국(국제 우체국)에서 서울로 국제전화를 신청하니, "피양(평양)?"이라는 질문이 날아왔다. "노! 서울(세울), 사우스코리아"

한참 뜸을 들이던 여자가 서울로는 전화가 안된다고 했다. 녜? 왜요? 국제전화를 연결하는 (국제)코드가 없다고 했다. 냉전시절 애매한 외교적 노선으로 서울보다는 평양과 교류가 더 잦은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서울로 연결되는 국제전화 코드마저 없어? 아니면 전쟁 통이어서 안되는 것인지, 구분이 안됐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기사를 모스크바로 보내, 모스크바 집에서 다시 서울로 넣어주는 방법이다. 모스크바 집으로 국제전화를 연결해 '사라예보에서 서울로 국제전화가 안된다'는 사실을 전해달라고 했다. 기사는 모스크바를 통해 보내겠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거의 매일 기사를 보내야했다.

월남전 파병을 종군한 기자들은 우리 군의 보호라도 받을 수 있고, 기사거리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딴 섬에 홀로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기자가 비록 내전 현장에 갔다고는 하지만, 뭐 대단한 기사를 쓸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는 것, 운전기사를 통해 주워들은 이야기, 나중에는 하루나 이틀 늦은 영자지를 살펴보면서 기사거리를 챙겼다. 현지에서 열리는 무슨 고위급 회의에도 찾아가 봤다. 누가 통역을 해주는 것도 아니니, 그냥 눈으로 보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렇게 1995년 연말을 사라예보에서 대책없이 홀로 보냈다. 전쟁 통의 사라예보는 연말 분위기이랄 것도 없었다. 오히려 모스크바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컸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지 한달여 만에 가장을 (비록 휴전합의는 이뤄졌다지만) 전쟁터로 떠나 보낸 세 가족은 신변 걱정도 한 바가지, 먹고 살 일도 한 바가지였을 것이다. 위층에 사는 모 대기업 주재원 가정의 도움이 없었다면, 거의 굶을 판이었다고 했다. 가뜩이나 정착이 쉽지 않는 러시아에서 가장까지 옆에 없으니. 모스크바의 첫해 연말을 눈물로 보냈을 터였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포격전의 흔적이 그래도 남아 있는 건물. 현지에는 이렇게 방치된 건물이 수두룩했다/사진출처:픽사베이,com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 보스니아가 다시 외신에 오르내린다. 내전 당시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용어까지 만들어낸 세르비아계의 스릅스카 자치공화국(RS)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보스니아는 현재 회교도와 크로아티아계(가톨릭)가 주도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릅스카 자치공화국으로 구성된 '한지붕 두가족' 체제다. 회교도와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주민을 대표하는 대통령 위원 3명이 8개월씩 돌아가면서 중앙정부를 통솔하고, 입법기관으로 연방의회가 존재한다. 

문제는 스릅스카 자치공의 지도자 밀로라드 도디크다. 그는 지난해 보스니아 중앙정부의 권한을 정지하고 독자적인 통치기구와 군대를 창설하겠다고 선언해 EU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미국이 5일 도디크에게 추가 제재조치를 가했다. '데이턴 평화협정'을 무시하려는 도디크의 시도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다.

그는 '친 푸틴' 인사다. 러시아가 미국·나토와 자국의 안보 문제를 협상하는 데 또 하나의 지렛대로 '도디크의 민족적 성향'을 이용한다면, 서방 진영은 골치가 매우 아플 판이다. 미국이 서둘러 도디크를 향해 추가 제재에 나선 것은 미·러 안보 협상을 앞두고 서방이 보스니아 통제력을 확고히하려는 시도라는 분석이 나온 이유다. 

그렇다고 그가 겁을 먹겠는가? 러시아가 앞으로 반미, 반유럽 투쟁의 강도를 높이면 높일 수록 도디크가 부추기는 세르비아 민족 감정은 보스니아의 불안한 안정을 26년 전으로 되돌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2022년 새해, 국제사회가 어쩔 수 없이 발칸반도로 다시 눈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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