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러시아의 천연가스 루블화 결제 요구, 득일까? 실일까?
(분석) 러시아의 천연가스 루블화 결제 요구, 득일까? 실일까?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2.03.2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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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락한 루블화 안정에 일시적 도움, 서방의 대러 제재에 맞선 보복 효과도 기대
유럽의 대러 에너지 의존도 줄이고 미 LNG로 눈 돌려 - 러시아 경제의 고립화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특수 군사작전 한달 째을 맞아 유럽연합(EU)를 향해 '가스 전쟁'을 선포했다. 푸틴 대통령은 23일 미국과 EU 등 비우호적인 국가들에게는 천연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비록, 가스 공급을 막겠다는 극단적인 공세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기존의 천연가스 거래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유럽 가스 시장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러시아와의 (휴전) 협상을 이끌고 있는 미하일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이 러시아의 '대유럽 선전포고'로 해석한 이유다. 

푸틴 대통령, 비우호적인 국가에 대한 가스 대금의 루블화 결제 지시/얀덱스 캡처

이번 조치의 결말은 쉽사리 가늠하기 어렵다. 러시아 천연가스에 대한 유럽의 의존도가 40%에 달해 단기적으로는 러시아가 유리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제 살 깎아먹기'가 될 공산도 크다. 그래서 서방의 가혹한 '봉쇄전략'에 러시아가 그만큼 급해졌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러시아는 이번 조치로 두가지 면에서 의도한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유럽 가스 가격을 대표하는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4월 선물 가격은 다시 1,000㎥당 1,500달러를 넘어섰다. MWh(메가와트시)당 132.25유로다. 이달 초 이후 안정세를 보이던 유럽 가스 시장을 흔들었다.

또 루블화 가치가 달러당 6% 정도 올라 지난 2일 이후 처음으로 달러당 95루블 아래로 떨어졌다(가치상승). 유로는 110.5루블. 

모스크바 거래소/사진출처:SNS

발표 시기도 절묘하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유럽 동맹국과 대러 추가 제재를 논의하기 위해 유럽 대륙에 발을 딛는 시점에 맞췄다. 바이든 대통령은 나토(NATO)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독일 등 유럽 주요국들과 러시아 석유의 수입금지 조치를 논의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석유 금수 조치에 반대하는 독일 등을 적극 설득할 것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러시아가 먼저 '에너지'를 무기로 꺼내든 것이다. 

독일은 EU가 러시아 석유를 수입 금지할 경우, 러시아는 천연가스 공급도 중단할 것으로 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그 가능성에 대해 이미 여러차례 경고한 바 있다.

러시아 에너지안보펀드 전문가인 스타니슬라프 미트라호비치(Станислав Митрахович)는 "EU는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를 끝내는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다"며 "필요할 경우 가스 공급을 먼저 중단하는 것이 게임을 바꾸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이번 조치로 루블화 수요를 늘려 군사작전 이후 40%가까이 폭락한 루블화의 안정화를 노리고 있다는 데 서방 전문가들도, 러시아 전문가들도 모두 동의한다. 차이는 그 효과의 지속성이다.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러시아 루블화/사진출처:픽사베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루블화 결제 요구의 효과가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조치가 지속적으로 루블화를 안정시킬 만큼 전체 수요를 늘리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에서다. 러시아 정부는 이미 가스프롬 등 에너지 회사에게 수출 대금으로 받은 외화의 80%를 의무적으로 루블화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 수입업자(외국인)들이 직접 루블화를 바꿔 지불하든, 수출업자(가스프롬 등)이 받은 외화를 루블화로 바꾸든, 전체 수요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러시아 전문가들의 주장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루블화 교환 시장에 참여하는 참가자가 많을 수록, 또 각 참가자의 거래 시점이 다양할 수록 수요 공급의 시장경제원리는 훨씬 안정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유니버 캐피탈'의 드리트리 알렉산드로프(Дмитрий Александров) 분석실장은 "외국의 가스 수입업자가 루블화로 가스 대금을 지불하려면, 루블화 계좌를 개설해야 하고, 모스크바 거래소를 통해 루블화를 확보해야 한다"며 "모스크바 거래소의 루블화 거래가 한층 활성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 러시아 금융대학 사회경제연구소 알렉세이 주베츠(Алексей Зубец) 소장은 "천연가스의 루블화 결제는 서방의 대러 금융제재를 우회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수입업자가 루블화를 확보하려면 모스크바 거래소에서 외화를 팔아야 하고, 그 외화는 러시아에 남게 된다"며 "러시아의 외환보유고 계정이 (5월 말이후) 동결되고, 외화 구입이 사실상 차단된 상태에서 러시아는 외화를 현금으로 손에 쥐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루블화는 러시아에서 태환성(외화와 교체할 수 있는 수준)도 높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루블화의 환율 변화에 따른 리스크도 분산 가능하다. 

전략적으로도 이번 조치가 기존의 에너지 거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캐피탈 랩(Capital Lab)의 파트너인 예브게니 샤토프(Евгений Шатов)는 "러시아가 그동안 시도해온 에너지 거래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서방의 대러 제재가 내려진) 지난 2014년부터 러시아는 에너지 대금 결제를 루블화로 바꾸는 아이디어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9년에는 막심 오레쉬킨 당시 경제개발부 장관(현재 대통령 보좌관)이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러시아 가스관/현지 TV 채널 '러시아-1' 캡처 

하지만, 러시아가 의도한 만큼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지는 아직 미지수다. 루블화의 안정이 어느 정도 이뤄질 것인지는 앞으로 두고봐야 한다.

러시아 전문가가 우려하는 것은 루블화 결제 요구가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국제사회의 수요를 줄이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려는 EU의 에너지 정책이 더욱 가속도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블루베이 에셋 매니지먼트의 신흥시장 전략가 티머시 애시는 "석유와 천연 가스 등 원자재의 시장 거래는 전통적으로 단일 통화(달러)로 이뤄져 왔다"며 "그것에 익숙한 수입업자들은 불편을 느낄 것이고, 러시아와의 거래를 꺼릴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미국이 EU에게 에너지 대체 공급원을 찾도록 압박하면서 스스로 유럽에 대한 LNG(액화천연가스) 공급을 늘릴 것"이라며 "궁극적으로 미국이 최종 승자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럽이 가까이 있는 러시아 가스를 포기하고 미국의 LNG가스로 눈을 돌릴 것이라는 걱정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LNG 가스 저장소가 활발하게 건설되고 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달러(혹은 유로)로 체결된 계약서를 수정하는 작업이 당장 필요하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장기 계약의 경우, 판매 가격은 1년 전에 외화로 표기된다"며 "시장 상황에 따라 일정 시점에 수정될 수는 있지만, 지급 통화를 변경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연가스를 판매하는 러시아 가스프롬의 경우,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실전 투자 교육' 설립자이자 전문 투자자인 표도르 시도로프는 "장기 계약으로 에너지를 해외에 공급해온 가스프롬은 대금 지급 통화의 변경이 기술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며 "외국의 일부 수입업자는 푸틴 대통령(정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계속 외화로 지불하겠다고 나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 특히 "가스프롬이 해외에서 필요한 장비와 서비스를 구입할 경우, 루블화를 다시 외화로 바꿔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국제사회로부터 러시아 경제의 고립'이다. 루블화 판매에 불만을 가진 서방 에너지 업체들이 러시아와 거래를 끊고, 나아가 에너지 자원개발에도 참여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는 점점 고립될 수 밖에 없다.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경제학자 제이슨 터비는 "루블화 결제 요구와 같은 러시아의 조치는 궁극적으로 러시아 경제를 국제 사회와 단절된 고립 상태로 몰고 갈 것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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