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 뒤집기-7) 루블화 '환율 전쟁'의 결과 - 개전 이전 상태로 거의 돌아왔다
(우크라 전쟁 뒤집기-7) 루블화 '환율 전쟁'의 결과 - 개전 이전 상태로 거의 돌아왔다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2.04.06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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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루블화의 가치가 우크라이나 군사작전 이전 수준까지 거의 회복했다. 군사작전 전날인 2월 23일 달러당 80.42루블로 고지됐던 루블화는 5일 83.35루블(6일 거래 기준환율)로 마감됐다. 개전 직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측의 가혹한 대러 경제제재로, 한때 달러당 120.38루블(3월 11일)까지 치솟았던(가치 하락) 루블화는 이제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하다.

평가는 대체로 러시아 정부가 환율 잡기에 '올인'한 결과라는 주장과 대러 제재에 맞선 러시아의 작전 승리라는 분석으로 모아지는 것 같다. '국가 부도설'까지 나돌았던 러시아가 어떻게 환율 방어에 성공했을까? 

루블화 사진출처:픽사베이
러시아 루블화의 변동 추이 그래프. 3월 11일 달러당 120.38 루블로 최고점을 찍었다. 오른쪽은 최근 열흘간 등락 표시.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가치 상승)/얀덱스 도표 캡처 

서방 측의 분석은 러시아의 '올인 작전'으로 쏠린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최근 '루블화가 회복된 기이한 사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환율은 다른 경제 지표들과는 달리, 조작하거나 숨길 수가 없어 러시아가 루블화 방어에 모든 힘을 쏟고 있는 결과"라고 진단했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시장경제 논리에 따라 매순간 결정되는 환율은 인위적인 조작이 불가능한 만큼, 러시아 정부가 환율 방어에 총력을 쏟고 있다는 뜻이다. 

루블화 방어의 최전선에는 당연히(?) 엘비라 나비울리나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가 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나비울리나 총재는 오는 6월 말 임기(5년, 2013년 취임했으나 전임자의 잔여임기로 4년후 재신임) 종료를 앞두고 일찌감치 사의를 표명했다고 한다. 러시아 금융시장에서는 미국과 EU의 전격적인 러시아 외환보유고 동결 조치로 무려 3천억 달러가 서방 주요 은행에 묶인 책임을 그녀가 져야 할 것이라는 책임론도 제기됐다.

고스두마(하원), 21일 나비울리나 중앙은행 총재 후보 심의/얀덱스 캡처
사임 철회: 나비울리나 중앙은행 총재는 무엇을 일궜고, 왜 그녀를 총재직에 유임시켰나/현지 매채 젤라보이 페테르부르그 웹페이지 캡처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그녀의 3번째 신임을 국가두마(하원)에 요청했다. 하원은 오는 21일 나비울리나 총재의 '재재신임' 여부를 심의, 결정할 계획이다. 크루그먼 교수마저 칼럼에서 나비울리나 총재의 루블화 방어 전략과 능력을 높이 평가한 만큼, 그녀의 재재신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녀의 방어 전략이 바로 '올인'이라는 게 크루그먼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실물 경제에 신경 쓰지 않고 루블화를 지키는 것은 통화 위기시 '프로파간다(선전) 전략'을 따질 때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러시아가 루블화 방어에 '올인'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
나비울리나 총재는 개전으로 루블화 환율이 폭락하자, 즉각 기준금리를 연 9.5%에서 20%로 두 배 이상 올렸다. 동시에 자본(외화)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한 강력한 조치들을 도입했다. 러시아 비거주자(외국인과 해외 기업의 현지 법인 등)의 해외 송금을 최대 1만 달러로 제한하는 등 외화가 러시아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촘촘하게 막았다.

모스크바 거래소(우리식으로는 증시)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유한 유가증권의 매도를 금지했고, 외국 큰손들의 증시 탈출을 막기 위해 주식 거래를 한달 가까이 막았다. 또 외화의 공급을 늘리기 위해 수출기업들은 외화 수입의 80%를 루블화로 바꾸도록 했다.

루블화 방어 작전에서 '신의 한수'는 바로 러시아의 천연가스 대금 루블화 결제 요구라는 분석이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내달(4월)부터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받겠다"고 발표한 뒤 서방 측에서는 "이미 외화 수입의 80%를 강제적으로 루블화로 바꾸도록 한 상태에서 이 조치가 루블화 안정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결과는 달랐다. 시장의 불안 심리를 말끔하게 지우면서 루블화 강세의 디딤돌이 됐다. 

루블화 안정세를 놓고 미국과 러시아가 신경전을 벌이는 모양새다. 미 백악관 측은 이달 초 "루블화가 러시아 중앙은행의 '인공적인 펌핑'으로 인해 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환율이 국가 경제의 실제 상황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실물 경제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서방측의 경제 제재가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주장이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 달러와 유로의 권위가 제재로 흔들렸다고 밝혀/얀덱스 캡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즉각 반박했다. "러시아를 향한 서방 진영의 '제재 게임'이 거꾸로 달러와 유로의 명성을 크게 흔들었고, 그 결과 루블화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나아가 "대러 제재를 계기로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상호 합의를 통해 교역및 거래를 자국 통화로 전환하고 있다"며 달러 중심의 전후 '브레튼 우즈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중국과의 거래는 위안으로, 러시아 가스 거래는 루블로 이뤄질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서는 러시아 주도의 유라시아경제연합(EAEC)과 중국 간에 독립적인 통화및 금융시스템 창설을 고려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폴란드 모라비예츠키 총리, 대러 제재의 효과 없음을 인정/얀덱스 캡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작전에 가장 비판적인 마테우스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도 최근 로베르타 메트솔라 유럽 의회 의장과 만나 "러시아 제재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며 "가장 확실한 증거는 현재의 루블 환율"이라고 말했다. 대러 제재의 효과가 떨어지면서 루블화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지난 달부터 러시아의 부도설이 제기됐지만, 지금까지 외채(이자) 상환은 차질없이 이뤄졌고, 4월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게 안톤 실루아노프 재무장관의 장담이다.

실루아노프 재무장관:러시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대외 채무 의무(상환)을 이행할 수 있다/얀덱스 캡처

그렇다면 러시아 금융시장 전문가들의 평가는 어떨까?

악센트 캐피털의 분석책임자인 엘레나 미하일로바는 "현재 외환시장에는 외화 수요보다는 공급이 많다"며 "수출업체들이 가득한 외화를 팔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대러 제재의 효과를 막기 위해 동원한 조치들이 외환 시장 현장에서 제대로 먹혀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대외 수입이 늘어나면 외환시장의 수요 공급 조건이 바뀔 수도 있으나 가스요금 루블화 결제 등으로 심리적 안정이 당분간 이어지면서 달러당 80~90루블의 안정세를 기대해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부 전문가는 장 안팎의 분위기로 볼때 현재의 루블화 강세가 계속 이어지면서 달러당 30~50루블까지 떨어질(가치 상승) 것이라는 다소 과격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전체적인 톤은 러시아가 환율 방어 전략에서 승리를 자신하는 기조라고 할 수 있다.

분석가, 루블화가 달러당 30루블까지 초강세를 보일 수도 있다고 전망/현지 매체 이즈베스티아 웹페이지 캡처

문제는 환율의 안정이 경제정책의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러시아의 강력한 통화 안정 수단이 실물경제가 위축을 넘어 불황으로 이어지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올해 러시아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20%로 역성장할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이 대표적이다.

소련 붕괴 후 수십 년간 쌓아온 해외 투자자들의 신뢰도가 이번 환율 방어 과정에서 크게 추락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집계에 따르면 러시아에 진출한 약 500개의 해외 기업이 러시아 지분을 처분하거나 투자및 운영을 중단할(이미 중단) 계획이다. 그 경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끝나더라도 수십 년 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고립될 것이라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 안보회의 부의장(전 대통령)은 "외국 투자 기업들이 자국 정부의 강압에 못이겨 러시아 철수를 결정했다"며 "다시 러시아 시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어디 가서 러시아만한 시장을 찾겠느냐?" "서방 기업들은 한시라도 빨리 러시아로 돌아오고 싶어한다"는 게 메드베데프 부의장의 주장이다.

메드베데프 부의장, 러시아로 돌아와야 하는 서방 기업들의 두려움에 대해 말했다/얀덱스 캡처

러시아로의 상품 배송을 중단한 삼성전자나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국내 대기업들이 진짜 러시아 시장을 버릴 수 있을까? 판단은 기업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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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도 2022-04-08 00: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