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 뒤집기) 마리우폴 '피난 버스'의 불편한 진실
(우크라 전쟁 뒤집기) 마리우폴 '피난 버스'의 불편한 진실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2.04.23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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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남부 격전지 마리우폴에서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인도주의적 '피난 버스' 운행 계획이 여러 차례 무산됐다. 그 책임을 놓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설전을 벌였다.

'피난 버스'의 운행은 자가 운전으로 스스로 대피한 난민들과는 다르다. 자가 운전자들은 개설된 인도주의적 통로 중에서 원하는 대피로를 따라 마리우폴을 탈출할 수 있지만, 피난 버스를 타야 하는 주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크라니나 통제 지역으로 가느냐, 러시아 통제지역으로 가느냐의 선택만 가능하다. 

러시아 통제지역으로 피난온 주민들이 버스에서 내리고 있다/사진출처:러시아 국방부 영상 캡처

현지 언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난민 문제를 담당하는 이리나 베레슈크 부총리는 20일 아침 텔레그램을 통해 “오늘 오후 2시부터 마리우폴에서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인도주의 통로 설치에 대해 러시아측과 사전 합의를 이뤘다”며 집결 장소 3곳을 지정, 공지했다. 

이미 마리우폴을 탈출한 우크라이나측의 바딤 보이첸코 시장은 우크라이나 국영 TV와의 인터뷰에서 “여성과 어린이, 노인 등 6천여 명을 탈출시키려고 한다”며 “러시아와 사전 합의가 유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주민들을 실어나를 버스 90대가 마리우폴로 향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 다음날 베레슈크 부총리는 “마피우폴 주민들을 태운 피란 버스 4대가 인도주의 통로를 통해 전날 마리우폴을 빠져나왔다”면서 "러시아측이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은 대충 마리우폴을 장악한 러시아군이 대피자들을 제때 피난민 집결장소까지 제대로 안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의 현지 장악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거나 군기가 해이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리나 베레슈크 우크라이나 부총리가 텔레그램에 올린 '피난버스' 탑승 집결지/캡처 

반면, 러시아 측은 "키예프(키이우) 측이 마리우폴의 '아조프스탈' 공장에 있는 민간인들의 대피를 방해했다"며 "개설된 인도주의적 통로를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러시아군 총참모부 산하 국방통제센터(Национальный центр управления обороной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우리식으로는 종합 상황실)의 미하일 미진체프 센터장(중장)은 20일 밤 "마리우폴에서 동쪽(러시아 관할 지역)으로 열린 기존의 통로 외에도, 우크라이나측과 사전 합의에 따라 서쪽(우크라이나 관할 지역)으로 향하는 인도주의 통로를 열었다"면서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이 '아조프스탈' 등 마리우폴 산업단지에 있는 민간인들의 탈출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미진체프 중장은 앞서 "러시아군과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군(민병대)는 전투행위를 중단하고 안전거리 바깥으로 물러났으며, 아조프스탈 공장 주변에는 서쪽, 동쪽, 북쪽 세 방향으로 각각 30대씩의 버스와 10대씩의 구급차로 구성된 호송 차량들을 준비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이 사전합의를 통해 인도주의 통로를 열었는데, 왜 피난민은 나타나지 않았을까? 누구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을까?

4대의 피난 버스가 출발한 20일, 대부분의 마리우폴 지역은 러시아군과 DPR군의 통제 하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이 최후 방어 거점으로 삼은 '아조프스탈' 공장 등 마리우폴의 산업단지는 우크라이나측 관할 지역으로 분류된다. 

아조프스탈 인근 산업지대 모습/우크라이나군 텔레그램 계정 캡처 

안전한 곳으로 대피를 간절히 원하는 A가족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우크라이나측 관할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면, 먼저 우크라이나군의 통제에서 벗어난 뒤 러시아군의 안내를 받아 '피난 버스'를 탈 수 있는 집결 장소로 가야 한다. 다행히 러시아군 관할 지역내에 있다면, 러시아군의 안내를 받아 집결지로 가서 버스를 타면 된다.

이때 가장 큰 변수는 우크라이나군이 탈출을 막거나, 러시아군이 집결지로 인도를 거부할 경우다. A가족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지난해 여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철수할 때 카불 공항으로 몰려나온 수많은 피난민들이나,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로 몰린 선량한 양민들의 운명을 떠올리면 의외로 답이 쉽게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1.4 후퇴에 남쪽으로 피난한 북한 주민들과 거꾸로 북으로 올라간 납북 혹은 월북인사들의 운명이 마리우폴 '피난버스'의 난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양측간의 신뢰부족이 마리우폴의 인도주의적 문제를 심화시킨 측면이 크다. 양측은 지난달 3일 벨라루스 '벨라베슈스카야 푸샤'(숲) 에서 열린 2차 협상에서 민간인 대피를 위한 인도주의적 통로를 개설하기로 합의한 뒤, 경쟁적으로 통로 개설 사실을 발표했다. 그리고 잘못될 경우, 상대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다. 서방 외신은 우크라이나측 주장을, 러시아 언론은 자국의 주장을 그대로 실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불편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측은 그동안 통제권을 행사해온 마리우폴 주민을 자국민이라고 보고, 자국의 통제권이 미치는 곳으로 대피로를 열고, 러시아측이 방해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측은 정확히 그 반대다.

인도주의 측면에서 유일한 해결 방법은 마리우폴 주민이 대피로를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자가 운전자들에게는 그 선택이 가능했다. 일부 주민들은 우크라이나 관할지역으로, 또 다른 일부는 러시아쪽으로 피난했다. 하지만, 스스로 탈출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피난 버스'를 타야 하는 소시민들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리우폴의 일상. 위로부터 길가로 나와, 물, 약품 등을 받기 위해 구호 장소에 몰린 주민들과 문을 연 쉬콜라(학교) 모습/현지 매체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KP) 동영상 캡처 

그나마 다행한 것은 러시아가 마리우폴의 완전 장악을 선언한 뒤 남아 있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긴급 구호 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시내 11곳에 구호센터를 열고 주민들에게 식량과 물, 생필품 등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DPR에 의해 임명된 새 마리우폴 시장은 22일 언론 인터뷰에서 "아조프스탈 공장 지역에 대한 러시아군의 철저한 봉쇄로 주민들이 안전하게 거리를 나다닐 수 있게 됐다"며 도시 정비 작업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우크라이나측은 아조프스탈 공장 지대에 갇힌 민간인 1천여명과 부상병 500명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지원해달라고 연일 호소하고 있다. 러시아측은 언제든지 백기를 내걸면 주민들의 안전한 이동을 보장할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문제는 '아조프스탈' 공장의 지하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우크라이나군이다. '결사항전'을 천명하는 이들을 향해 러시아군이 계속 투항을 설득하지만, 별무 성과다.

대신, 러시아군과 DPR군이 산업지대 주변의 지하 대피시설을 찾아가 주민들을 설득한 뒤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고 있다. 최근에도 '아조프스탈' 공장 출입구 근처에 있는 아파트 단지(아조프스탈 직원들 숙소로 추정)의 지하에서 주민 100여명을 설득해 안전지대로 옮겨가도록 했다. 결국 '피난버스'를 타야 하는 소시민들의 운명은 누가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느냐에 달린 셈이다. 

지하 대피시설에 나온 주민들을 안내하는 DPR군/사진출처:러시아 국방부 텔레그램 캡처

러시아군의 이같은 주민 통제도 우크라이나군의 위장 탈출을 막기 위한 봉쇄작전의 일환으로도 이해 가능하다. 현지의 우크라이나 제 36 니콜라예프 해병여단 사령관 세르히 볼린은 최근 '아조프스탈 공장'에 남아 있는 우크라이나군이 제 3국으로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영상물을 올렸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엉뚱한 곳에다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무기를 내려놓고 나오면 적법하게 포로대우를 하겠다"고 거듭 설득했다.

민간인들은 무기를 든 군인들과 다르다. 마리우폴에 남아 있는 주민 12만명(우크라이나측 주장) 중 원하는 사람은 다른 지역으로 떠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소위 '부역자' 딱지가 붙을 수 밖에 없는 친우크라이나 인사들은 우크라이나행 '피난버스'를 탈 수밖에 없다. 러시아군도 이들의 탈출을 막아서는 안된다. 

이달 초부터 간간이 진행된 국제적십자사의 마리우폴 '피난버스' 불방 논쟁도 크게 보면 현재 진행중인 상황과 다를 것 없다. 국제적십자사 측이 우크라이나 측의 주장을 따라 '피난 버스' 행렬을 움직이면, 러시아측이 제어하고, 러시아측의 주장을 따르면 우크라이나측이 아예 운행 자체를 거부해 왔다.

솔직히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일은 아니다. 전쟁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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