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 6개월) '양날의 칼'로 작용한 서방의 가혹한 대러 제재 조치
(우크라 전쟁 6개월) '양날의 칼'로 작용한 서방의 가혹한 대러 제재 조치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2.08.22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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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행복할 것" 주민의 희망은 "일상이 전쟁"이라는 말?
서방의 제재에도 아직 끄떡없는(?) 러시아 - 환율 안정에 대체재 개발, 병행수입까지

24일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6개월이 되는 날이다. 예상보다 길거나 혹은 짧은 기간, 전쟁 자체에 대한 관심은 많이 식었고, 지구촌 실생활에 닥쳐온 에너지및 식량난, 물가 폭등 등 '경제 불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바이러시아(www.buyrussia21.com)도 그동안 전쟁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실었지만, 이젠 달라져야 하는 분위기를 확연하게 느끼고 있다. 

러시아 일각에서는 "진격이 왜 이렇게 더디냐"는 불만에 찬 목소리도 나온다. 전쟁의 피로도가 일상에 와닿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된다. 최전선에서 '보스토크'(동쪽)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 호다코프스키는 이 물음에 이렇게 답변했다고 현지 모스코프스키 콤소몰레츠(MK)는 20일 전했다. 

"사람(부하)의 목숨을 (주목을 받으려는) SNS 포스팅과 바꿀 수는 없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니, (그 같은) 걱정은 저 깊은 곳에 넣어두라".

그러면서 그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도네츠크주(州)의 한 주민의 말을 전했다. "모든 것이 2월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행복할텐데..".

러시아군의 진격이 더딘 이유를 밝힌 호다코프스키 부대장을 다룬 MK 웹페이지/캡처

돈바스 지역(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에서 전쟁은, 폭격과 공습, 포격과 총격전 등은 이제 일상이 됐다. 전선은 러시아가 병합한 크림반도로 확전되는 모양새다. '2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는 현지 주민에게 평화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지켜보는 우리부터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전쟁 발발 6개월을 맞아, 전쟁 그 자체보다 러시아의 일상과 현지 진출 기업들의 동향에 초점을 둔 시리즈를 시작하는 이유다/편집자 주

"러시아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들은, 시장원리에 따라 경쟁자들이 틈새 시장을 파고들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러시아 시장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러시아 산업통상부 빅토르 예브투호프 차관은 지난 19일 현지 리아노보스티 통신과의 회견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들의 복귀 전망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예언이 머리에 와닿은 것은 8년 전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돈바스 지역의 무장 독립투쟁과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요약되는 소위 '우크라이나 분쟁'의 초기였던 지난 2014년, 자동차와 가전 등 많은 해외 브랜드들이 러시아 시장을 떠났다. 삼성과 LG, 현대자동차 등 우리 기업들은 쌓이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현지에서 틈새시장을 공략하며 버텼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지금 아는, 러시아 시장에서의 우리 기업의 위상 그대로다.

러시아는 8년 전과 마찬가지로 서방 진영의 제재조치에 따라 외국 기업들이 떠난 자리를 '기업 인수'나 짝퉁 브랜드 개발, 대체 수입품 개방, 병행수입 등 다양한 정책으로 메꿔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유럽의 주요 언론들이 인정할 만큼, '경제적 혼란에 대한 우려'가 많이 줄어든 상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영국의 유력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즈(FT)는 전쟁 발발 6개월을 앞둔 20일 "러시아 경제의 회복력은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경제 전반적으로는 러시아 중앙은행이 자본 통제와 금리 인상 등을 통해 루블화 안정을 이뤘고, 서방의 러시아산 에너지 금수 정책은 가격 상승과 중국, 인도, 터키 등으로의 수출 다변화로 사실상 무산됐다고 지적했다. 또 서방의 일부 기업은 러시아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서둘러 러시아를 떠난 외국 기업은 자산을 현지 사업가에게 매각하면서 '비즈니스' 자체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FT:러시아 경제, 서방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제재 결과와 비교하면 더 낫다/얀덱스 캡처
프랑스 제 2TV채널:러시아 마트의 선반은 다양한 상품으로 가득 차 있다/얀덱스 캡처

프랑스의 제 2TV 채널도 서방의 제재조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대형 마트는 다양한 상품으로 가득 차 있다"며 "유럽과 다를 바 없다"고 전했다. 제재 6개월여가 지나면 러시아가 식료품 등 생필품의 극심한 품귀 현상에 시달렸던 1980년대 말, 90년대 초의 소련 시절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던 전망이 어긋났다는 '놀라움'이 묻어나는 리포트다. 

물론, 경제 제재의 효과는 단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계속 러시아를 강도높게 제재해야 한다고 강경론자들이 주장하는 이유다. 하지만,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에 대한 심리적 공황상태는 일단 벗어나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특히 경제 제재에는 순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뜨거운 한여름의 막바지에 유럽 대륙 전체를 들썩거리게 만든 에너지및 식량 물가의 폭등이 대표적이다. 올 겨울엔 유럽의 일부 국가에선 난방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경제 제재는 그 고통이 러시아에만 한정되는 게 아닌 '양날의 칼'이다. 

러시아의 생산 시설을 폐쇄하거나 사무실을 이전하고 떠난 외국 기업들은 수십만 달러에서 수백만,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손실을 예상하고 있다. 덩달아 많은 러시아 근로자들은 실직하거나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기업(외국)도 직원(러시아)도 함께 망하는(?) 시나리오가 아닐까 싶다. 떠난 외국 주요 브랜드는 러시아 매출이 전체의 1% 안팎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케아 직원이 상품을 깨뜨려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텔레그램 영상 캡처
러시아의 이케아 매장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해외 브랜드 중에서 모스크바인들이 가장 아쉽게 여기는 업체는 스웨덴 가구업체 이케아(IKEA)로 나타났다. 러시아 독립 여론조사업체 레바다센터가 지난달 초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모스크바 시민들은 떠나서 걱정되는 해외 브랜드로 이케아(26%)를 가장 많이 꼽고, 맥도날드(14%)와 의류 브랜드 자라(10%), 애플(9%), 아디다스(7%), H&M(7%), 나이키(7%), 삼성 휴대폰(4%) 등을 들었다. 

이중 맥도날드는 러시아 사업가가 매장 전체를 인수한 뒤 비슷한 '메뉴'도 하나 둘 선보이면서 사실상 성공적으로 대체됐다. 이케아를 대신할 가구업체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재고 정리를 위한 온라인 쇼핑몰이 여전히 운영 중이고, 현지의 한 교정시설이 수감자들을 동원해 이케아 유사 상품을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스웨덴 의류브랜드 H&M은 지난 2일 모스크바 주요 매장의 문을 다시 열었다. '재고 정리'라고했지만, 러시아에서 3개월에서 1년 정도 문을 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9년 H&M 1호점을 낸 '메트로폴리스' 매장에서는 2주 이내 반품이 가능하고, 휴업하기 전보다 가격이 20%나 오른 상품도 눈에 띈다고 한다. '재고 정리'라고 보기엔 수상한 구석도 없지 않다는 게 현지 매체의 평가다. 일부 쇼핑몰에는 긴 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더욱이 현지 의류회사인 글로리아 진스(Gloria Jeans)는 H&M에서 남은 의류와 신발, 액세서리 등을 인수해 H&M 유사 매장 오픈을 모색하고 있다며 언제든지 H&M 브랜드를 대체할 태세다. 

H&M 매장 앞에 길게 줄을 선 러시아인들/텔레그램 캡처

식료품 부문에서는 철수한 브랜드를 대신하는 상품을 이미 찾았다는 응답이 77%에 이르고, 의약품 및 개인 위생용품(69%), 의류(65%) 등도 비교적 빠르게 브랜드 교체가 이뤄지는 중이다. 반면 기계 및 전자제품과 자동차 부문에서 수입 대체가 가능할 것이라는 응답은 각각 41%, 33%로 낮았다.

그럼에도 모스크바 시민의 대부분(72%)는 외국 브랜드의 철수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걱정한다는 응답은 27%. 서방의 제재가 러시아에 상당한 피해를 입힐 것이라고 보는 모스크바 시민도 26%에 그쳤다. 

모스크바 시민들이 가장 걱정하는 자동차의 경우, 유럽 및 일본 자동차 회사의 신형 모델이 러시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가제타 루(Gazeta Ru) 등 현지 언론은 19일 전했다. 러시아 정부가 서방의 대러 제재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한 '병행 수입' 덕분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랜드로버(Land Rover)와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Benz), 렉서스(Lexus), 폭스바겐(Volkswagen) 등 유명 브랜드의 신형 자동차들이 8월 들어 러시아 시장에 나타났다. 현지 자동차 판매업체 '아프토돔'의 안드레이 올호프스키 대표는 "공식 딜러들이 '병행 수입'을 통해 수입하는 자동차는 월 2천~3천대로, 주로 아랍에미레이트(UAE)와 독일에서 들여온다"면서 "그러나 이전과 비교하면 수입 물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했다. 신차 공급 물량이 크게 줄어들면서 현지 중고자동차 시장이 부쩍 활기를 띠는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자동차 딜러들, 폭스바겐, 렉서스, 랜드로버 등 새 자동차들을 병행수입을 통해 러시아로 들여왔다/얀덱스 캡처

신형 휴대폰의 수입도 상당히 줄었다. rbc 등 현지 매체는 17일 현지 전자기기 개발 업체 GS그룹의 분석을 인용, "올해 첫 6개월 동안 전년에 비해 38%가 줄어든 990만 대의 스마트폰이 러시아로 배송됐다"고 추정했다. 이 중 270만 대는 저가형(1만 루블이하), 550만 대는 중간형(1만~3만 루블 가격), 160만대는 고가형 기기다. 특히 저가형 스마트폰의 수입이 56%나 급감했는데, 삼성 스마트폰의 러시아 철수와 샤오미 등 중국 브랜드의 대러 수출 축소 정책 때문이라고 GS그룹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가격은 절반이상 올랐다. 현지 이통사 MTS는 1만 루블짜리 스마트폰이 현재 1만5천 루블에 판매되고 있다고 밝혔다.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저가형 스마트폰 기기가 인도나 중국보다 약 50% 더 비싸다고 한다. 루블 환율과 물량 부족 때문이다. 기기의 점유율도 저가형이 27%(전년 38%), 중간형은 56%(46%), 고가는 17%(16%)로 저가형 구매가 크게 줄어들었다.

IT전자 분야의 광범위한 대러 제재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스마트폰 공급이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는 것은 재고와 '병행 수입' 덕택인 것으로 보인다. 재고가 줄어드는 만큼, 병행 수입은 늘어나는 구조여서, 총 공급량은 앞으로도 지난 6개월과 다를 게 없을 전망이다. '병행 수입'의 도입이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

러시아의 삼성 휴대폰 매장(위, 오픈소스)과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홈피

러시아 통상산업부가 '병행 수입' 가능 품목을 공식 확정한 것은 지난 5월 초다. 애플과 삼성 등 약 100여 개 브랜드의 제품이 포함됐다. '병행수입'이란 저작권자(공식 수출업자)의 허가없이 누구나 수입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러시아는 현지에서 대체가 빠르게 이뤄지는 품목의 경우, '병행 수입' 허가 대상 품목에서 제외할 것이라고 이미 발표했다. 연말까지 '병행수입' 규모가 16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케아와 H&M 등에서 보듯, 외국 브랜드가 계획한 대로 러시아 시장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것은 러시아 특유의 비즈니스 환경에 의한 것이라고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6월 지적했다. 복잡하고 불분명한 절차와 인수 후보 물색의 어려움, 러시아 당국의 압박 등이 주 원인으로 꼽힌다.

이 신문은 러시아 당국의 압박이 '반 협박'이라고 전했다. 러시아 검찰과 근로감독관 등이 생산 감축이나 사업 철수 의사를 밝힌 서방 기업들에게 곧장 연락을 취해 근로자들의 부당 해고 등에 대한 경고장과 소환장을 발부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기업 대표들을 체포하겠다고 협박한다는 것이다. 

서방 기업들은 또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제제를 받는 기업에는 러시아 사업체를 매각할 수 없어 울며겨자 먹기로 넘긴다고 했다. 프랑스 자동차 회사 르노가 지난 5월 러시아 자회사 아브토바즈의 지분 68%를 러시아 국영 자동차연구개발센터(NAMI)에 단돈 1루블에 넘긴 게 대표적이다. 

러시아가 주도권을 쥔 에너지 개발 부문에서는 아예 '국영화'(?) 시도도 추진중이다.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는 지난 2일 극동 지역 사할린에서 석유·천연가스를 개발하는 사업인 '사할린-2 프로젝트'의 새 운영자 설립을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사할린-2 프로젝트'의 지분은 러시아 가스프롬을 중심으로 영국 석유기업 셸(27.5%), 일본 미쓰이물산(12.5%), 미쓰비시상사(10%) 등이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는 셸 등 해외 투자사가 새 운영자의 설립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투자 지분을 사실상 빼앗겠다는 뜻을 분명히했다. 러시아 제재에 적극 동참 중인 일본이 '사할린-2 프로젝트'에서는 철수할 의사가 없다고 한 것도 이때문이다. 일본 정부와 기업의 대러 제재 딜렘마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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