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일의 러시아속으로) 소련의 폐쇄도시에서 관광, 우주도시로 거듭난 볼가강변의 사라토프
(김원일의 러시아속으로) 소련의 폐쇄도시에서 관광, 우주도시로 거듭난 볼가강변의 사라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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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9.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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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붕괴하기 직전(1990년)까지만 해도 외지인의 방문이 제한된 곳이 여럿 있었다. 우주인 훈련장이 있는 모스크바 인근의 '스타시티'(Звёздный городок, 원래는 우주개발을 위한 모든 시설이 모여 있는 도시였다), 첼랴빈스크 등 러시아 중부의 몇몇 핵개발 지역,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었던 블라디보스토크 등이 비밀 혹은 폐쇄된 도시로 분류됐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볼가강을 끼고 있는 사라토프도 1990년까지 외지인의 출입이 차단된 도시였다. 2차 세계대전후 소련의 주요 방위 산업체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특히 군용기 제작과 우주개발 업체들이 많았다. 

사라토프 기차역

필자는 1년 전, 말로만 듣던 사라토프로 출장겸 휴가를 갔다. 소련이 해체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사라토프는 과거의 폐쇄 도시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러시아의 '젖줄'격인 볼가강을 끼고 발달한 교통의 요지로, 또 교육과 문화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청소년기를 보내고 첫 우주비행후 착륙(?)한 '우주인의 도시'이기도 하다. 2020년 새로 건설한 사라토프 국제공항 이름을 '가가린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붙인 이유다.

또 제정 러시아 말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으로 러시아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명한 작가 니콜라이 체르니세프스키(1828~1889년)가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고 영면에 든 곳이다. 레닌도 그의 혁명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 큰 감동을 받고, 자신의 혁명 작품에도 같은 제목('무엇을 할 것인가')을 붙였다. 한국에서 소위 '격동의 80년대'를 지낸 원조 386세대 중 이 소설을 탐독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본다.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다양한 버전(위)과 초판본/

러시아 포탈 얀덱스(yandex.ru)에서 사라토프를 검색하면, '사라토프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 10가지'라는 포스팅이 눈에 들어온다. 30여년 전의 '폐쇄 도시' 사라토프는 어디로 갔을까? 싶다. 10가지 이유로는 과거로의 여행과 볼가강의 위대함, 역사적인 독일거리, 가가린 발자취, 문화및 예술의 매력 등을 꼽았다. 

사라토프는 행정구역상으로는 볼가 연방관구 사라토프 주의 주도다. 볼가강을 사이에 두고 엥겔스와 마주 보고 있어 '쌍둥이 도시' 느낌이 강하다. '사라토프'라는 이름은 타타르어로 노란 산이란 뜻의 '사르타우'(Сарытау)에서 왔다고 한다. 러시아 제국의 기초를 닦은 표트르 대제가1590년대 볼가강 연안 지역을 다니면서 여러 정착지를 건설했는데, 사라토프도 이때 같이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시가 발전한 계기는 제 2차세계대전이다. 소련군이 독일군에 맞서 '지연전'(War of Attrition) 전략을 구사하면서 모스크바 등 서부 지역을 비우고, 군수 분야 등 산업 시설을 이 곳으로 옮겼다. 또 수십개의 야전 병원을 세우는 등 사라토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련의 핵심 병참기지 역할을 맡았다.

키로프 거리의 고딕식 건물
키로프 거리의 모습

사라토프 여행은 중심가의 '키로프가(街)'(프로스펙트 키로프)에서 시작된다. 러시아어로 '대로'를 뜻하는 '프로스펙트'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다. 초입에 큼지막한 체르니세프스키 동상이 서 있고, 과거와 현대식 건물이 혼재된 길이다. 원래 이 거리는 18세기에 이주해온 많은 독일인들 때문에 '(볼가지역) 독일인 거리'(улица Немецкая)로 불렸다. 독일식 건물이 아직도 많고, (독일인을 위한) 옛 가톨릭 성당도 남아 있는데, 지금은 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유학온 학생들이 주로 찾는다고 한다. 독일 총영사관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번창하던 독일인 사회(자치주)는 2차대전 발발 직후인 1941년 연방정부의 결정에 의해 폐지되고, 거주 독일인들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의 운명은 고려인 동포들이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것과 다를 바 없어,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이 거리를 돌아보게 된다. 

소련이 붕괴된 뒤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이 곳으로 옮겨왔다. 현재 4,000여명에 이르는 사라토프 고려인 동포사회는 고려인센터 '동막골'을 중심으로 우리의 고유 전통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동막골'은 지난 2018, 2019년 국립남도국악원의 국악연수 초청를 받아 산하의 국악무용단 '야생화', 사물놀이팀 '매산' 등을 한국에 연수보내기도 했다. 

사라토프 고려인 동포사회의 중심지인 '동막골'
'동막골'의 대표 안드레이-세르게이 김

'과거로의 여행'은 사라토프 역사박물관과 체르니세프스키 기념관, 2차대전 승리공원을 차례로 방문하면 가능하다. 오랜 역사의 호흡을 느낄 수 있다. 사라토프 역사박물관에는 이 곳이 먼 옛날 바다였음을 보여주듯 고래 등 해저 생물 화석들이 많고, 맘모스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다. 또 슬라브족이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전, 이 곳을 삶의 터전으로 닦아온 여러 소수 민족들의 '과거'도 볼 수 있다. 독일인들이 2차 세계대전 직후 이 곳에서 쫓겨나면서 남긴 독일 가톨릭성당의 성모상 등 성물들도 적지 않게 보관돼 있다. 

사라토프 역사 박물관 입구
사라토프 역사박물관의 내부 모습. 위는 맘모스, 아래는 독일 가톨릭 성당에 있었던 성모상등 성물들

체르니세프스키 기념관에는 작가의 일생을 보여주는 다양한 기념물 외에도, 조상대대로 내려온 17세기 성경과 200년이나 된 시계도 전시돼 있었다. 필자가 방문한 날, "2주 후부터 1년 반동안 개보수를 위해 문을 닫는다"고 했으니, 아직도 수리중일 것이다. 새로 단장한 체르니세프스키 기념관이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체르니셰프스키의 책상
체르니셰프시키 기념관의 모습
체르니셰프스키 기념관 표식

2차 세계대전 승전의 역사는 '소콜 언덕'(매의 언덕)으로 불리는 '승리공원'에 두루 펼쳐져 있다. 특히 소련(러시아)의 온갖 군사장비와 무기들이 전시돼 있는데, 왠만한 나라의 국방력 수준에 버금갈 정도다. 

숭리공원에 전시된 각종 군사장비들

승리공원의 맨꼭데기에는 '쥐라블'(학, 혹은 두루미)들이 비상하는 조형물들을 머리에 인 삼각탑이 높게 서 있다. 2차 세계대전 전몰 장병 추모기념탑(러시아식 명칭은 쥐라블 기념탑 Мемориал Журавли)이다. 

승리공원의 추모기념탑

'매의 언덕'에서 내려오면, 광활한 대지 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볼가강과 마주하게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볼가강 물길을 지켜보며, 러시아인들이 왜 "어머니 볼가강"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강폭은 대개 3~4㎞에 이르고, 넓은 곳은 10㎞가 넘는다고 한다.

볼가강 위로 뜨는 아침 태양(위)와 볼가강

볼가강을 가로질러 건너편 '엥겔스'와 이어주는 다리는 1965년 건설됐다. 유럽 최장 다리 중의 하나로 꼽히는 '사라토프 대교' (Саратовский мост)다. 길이만 3㎞에 달하는 이 다리를 건너면 독일 자치주(엥겔스슈타트·Engelsstadt) 시절에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 엥겔스다. 

엥겔스 상징, 'I Love 엥겔스'다.
재미있는 엥겔스의 도로 표지판
엥겔스 역사를 보여주는 게시판들
독일인의 강제이주를 위로하는 기념탑

사라토프 여행에서 진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첫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발자취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착륙한 곳에 이르자, 마치 필자가 방금 우주여행에서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 곳은 그가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우주비행에 나섰던 1961년 4월 12일에는 콜호즈(집단농장)에 속한 감자밭이었다고 한다. 감자밭을 일구던 농부들은 하늘에서 괴물체가 떨어지자 혼비백산했고, 가가린은 '착륙 캡술'에서 나와 책임자에게 상황 설명을 한 뒤 트럭을 타고 콜호즈 본부로 가 우주센터에 무사귀환을 신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가린이 지상에 착륙한 감자밭 일대에 조성된 '우주공원'의 모습

가가린의 존재는 이제 사라토프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사라토프 행정당국은 지난 2020년 도시 재정비 사업을 벌이면서 구시가지를 아예 '가가린스키 구'로 지정하고, 국제공항도 '가가린 국제공항'으로 명명했다. 사라토프국립기술대학의 정식 명칭도 '가가린 이름의 사라토프국립기술대학'이다.  

사라토프 국립기술대학의 명패(위)와 대학교내 가가린 흉상

글·사진:김원일 모스크바대 정치학박사, 전 민주평통 모스크바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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