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축구의 아시아권(AFC) 편입에 아직 찬반 팽팽 -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러시아 축구의 아시아권(AFC) 편입에 아직 찬반 팽팽 -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2.12.26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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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축구협회(RFU)가 수십년간(구소련 포함) 활약한 유럽축구연맹(UEFA)을 탈퇴하고 아시아축구연맹(AFC) 가입을 검토중이다. 찬반 의견이 치열하게 다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당초 지난 23일 최종 결론을 내기로 한 RFU가 오는 27일로 결정을 미룬 이유이기도 하다. 여전히 명분과 실리, 실리와 또다른 실리 사이에서 러시아 축구계가 고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력 경제지 코메르산트와 스포츠 전문지 챔피오나트(챔피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축구협회 집행위원들과 프로축구 구단 구단주, 전현직 러시아 국가대표 선수들은 저마다 RFU의 AFC 이전에 대해 찬반 의견을 표시하고 있다. 집행위원 대부분이 UEFA 탈퇴, AFC 가입을 지지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러시아(구소련) 축구를 세계에 알린 유명 선수들의 반대 목소리도 들린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갇힌 러시아 축구, 러시아 축구협회는 뭘 두려워하나/젠(dzen.ru)노보스티 캡처
알렉산드르 듀코프 러시아축구협회장/사진출처:러시아 축구협회 홈페이지

러시아의 AFC 가입에 드라이브를 거는 이는 알렉산드르 듀코프 러시아축구협회장이다. 듀코프 회장은 카다르 월드컵 열기로 뜨겁던 이번 달 초, "몇달 전에만 해도 러시아의 AFC 가입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고려할 때가 됐다"며 지난 23일 집행위 회의에서 AFC 가입을 정식 논의 주제로 올렸다. 결과는 치열한 찬반 논쟁 끝에 27일로 최종 결정을 미룬 상태다.  

AFC 가입 논의가 시작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특수 군사작전으로 국제축구연맹(FIFA)과 유럽축구연맹(UEFA)이 주관하는 모든 국제 대회 출전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두 축구 연맹은 러시아 국가대표팀은 물론, 러시아 프로 축구팀 모두에게 출전 금지 제재를 가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카타르월드컵 유럽지역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부전패를 당했고, 러시아 프로 축구클럽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는 유로파리그에서 퇴출됐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지난 7월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항소했으나 기각됐다. 

국제대회에서, 특히 유럽 무대에서 기량을 선보일 기회를 잃은 러시아 축구 선수들은 기가 꺾였고, 축구협회는 나름대로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나온 방안이 출전 금지된 유럽 무대를 떠나 아시아로 가자는 것이다.  

러시아 축구협회 로고/사진출처:홈페이지

러시아가 AFC로 소속을 바꾸면, 국가 대표팀과 프로 클럽들은 UEFA 주관이 아닌 아시안컵 혹은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 나서게 된다. 아시아에서 최고 기량을 지닌 한국과 일본, 이란, 호주 등과 러시아가 월드컵 진출을 놓고 맞붙는 장면도 가능해진다. 러시아의 FIFA 랭킹은 37위로 우리나라(25위)보다 낮지만, 아시아 정상을 다툴 만한 전력을 갖추고 있다.

유라시아 국가인 러시아가 UEFA을 탈퇴하고 AFC로 간다고 해서, 명분이나 정체성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찬반 의견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세계 축구계를 양분하는 유럽과 남미에 비해 급이 한단계 떨어지는 AFC로 꼭 가야만 하느냐는 자존심의 문제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일본 등 AFC 소속 국가들이 선전을 했다고 해도, 실력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다. 전직 국가대표 선수들이 한사코 반대하는 이유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은 거꾸로 AFC를 떠나 UEFA로 적을 옮겼다(2002년). 

하지만, 축구 행정을 맡고 있는 집행위원회 측 시각은 좀 다르다고 한다. 듀코프 회장은 "이 문제는 적어도 앞으로 10년 간 러시아 축구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적 결정이 내려지면 러시아는 먼저 UEFA를 탈퇴해야 한다. 새 시즌이 시작되기 6개월 전인 12월 31일까지는 탈퇴를 통보해야 한다. 이미 2024 유럽 선수권 대회의 조 추첨에 초대조차 못받은 상태에서, 자칫하면 2026년 북미(미국 캐나나 멕시코 공동주최) 월드컵 유럽 예선 출전도 불가능해진다. 

AFC 가입에도 시간이 걸린다. UEFA가 연맹 변경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확인서를 포함한 신청서류를 낸 뒤 AFC 총회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 가입 여부는 총회에서 투표(47개 회원국 중 절반 이상 찬성)로 결정된다.

AFC 가입은 무난할까? 듀코프 회장은 타스 통신과의 회견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를 받아줄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우리의 호소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고, 나아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와의 비공식적 합의도 필요한데, 듀코프 회장은 FIFA가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는 건 확실해 보인다. 

러시아 축구 프리미어 리그 소속 모스크바의 스파르타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니트 팀간의 지난 11월 경기 모습/사진출처:러시아축구협회 홈페이지

러시아가 AFC로 옮겨갈 경우,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RPL)의 내부 일정 조정이 꼽힌다. 역시 시간이 필요한 사안이다. 기존의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 대륙으로 가려면 이동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리고, 시차 등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용 문제도 있다. AFC(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하는 팀에게는 토너먼트 단계에 따라 3만달러~9만달러의 비행 보조금이 제공되는데, 러시아 축구 클럽은 UEFA 시절과는 달리 추가 비용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AFC 챔피언스 리그가 지리적 위치에 따라 동부와 서부, 두개의 디비전(지구)으로 나눠져 있다는 점이다. 

대회 상금 액수도 축구 클럽에게는  또다른 실리 차원의 문제가 된다. AFC 챔피언스 리그의 상금은 유럽 UEFA보다 훨씬 적다. 지난해 AFC 우승자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힐랄'은 유럽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 약 10배 적은 400만 달러를 받았다. 

러시아 축구 팬들에게도 AFC 이전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판이다. 축구 팬들은 UEFA의 3부 리그에서 뛰는 유럽 축구팀은 알고 있어도, 아시아의 유명 축구 클럽도 잘 모르는 게 현실이다. 명분보다 실리적인 차원에서도 반대 의견이 나올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코프 회장은 "거의 모든 러시아 프로축구 클럽이 AFC로의 이전에 찬성한다"며 “구단의 절반이 별도 논의 없이 이전하는데 동의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축구팀을 위해서나, 선수 개개인을 위해서나 경기를 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경기에 뛰지 않으면 모든 꿈이 사라진다고 듀코프 회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러시아 축구 대표팀은 이미 2024 UEFA 유럽선수권대회 조 추첨에서 제외됐다. 지난 1년간 A매치 상대도 구하지 못해 구소련권의 키르기스스탄(2-1)과 타지키스탄(0-0), 우즈베키스탄(0-0)과 비공식 친선경기를 치른 게 전부였다. 모두 AFC 회원국이다. 러시아가 AFC로 적을 옮기면 중앙아시아 국가들보다는 기량이 훨씬 뛰어난 한국, 일본, 이란, 호주 등과 공식, 비공식 A매치가 의외로 쉬워질 게 분명하다.

2026 북미 월드컵 출전 가능성도 확 높아진다. 2026 월드컵부터 본선 진출 국가가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늘어난다. 덩달아 아시아 대륙(AFC)에 할당된 티켓도 4.5장에서 8.5장으로 2배 가까이 는다. 유럽예선에서 고배를 드느니, 아시아 예선에서 손쉽게 본선 진출 티켓을 따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출전을 사실상 금지당한 러시아가 2026 미주 월드컵까지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출전을 못한다면, 2030년까지 12년(2018 러시아월드컵 당연 참가)간 세계 최고무대에 서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축구협회나 선수들에게는 잃어버린 10년이 될 것이다. 

러시아 챔피언리그와 러시아컵 우승을 차지한 로만 쉬로코프, 러시아 축구팀의 아시아 이전 구상을 비판/젠(dzen.ru) 노보스티 캡처
러시아 축구 리그에서 뛰던 시절의 황인범 선수/사진출처:축구클럽 루빈 카잔 홈페이지

실제로 러시아의 젊은 축구 선수들이 해외 진출을 위해 불가피하게 국적을 바꾸고,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던 해외 선수들이 이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듀코프 회장은 "다수 국가의 축구협회와 클럽들이 러시아의 유망한 젊은 선수들에게 국적을 바꾸도록 설득하고 있다"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러시아 스포츠의 아시아행 검토는 이달 초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올림픽 서밋(최고 결정 기구 회의)에서 처음 거론됐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측은 서밋에서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대한 징계를 존중하면서 이 나라 선수가 아시아 지역 대회에 나올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스포츠 정신을 정치적 결정보다 우위에 둔 '합리적인 제안'으로 받아들여졌고,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가 2024년 파리 하계올림픽에 아시아 지역 예선을 거쳐 출전하는 방안이 유력해졌다고 한다. 러시아 축구의 AFC 이전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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