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자동차 시장의 한-중-일 '삼국지' 쟁패 구도, 현대차는 촉나라를 닮아간다?
러시아 자동차 시장의 한-중-일 '삼국지' 쟁패 구도, 현대차는 촉나라를 닮아간다?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03.3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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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동차 시장 공략에 앞장서온 한·중·일 3국의 자동차 브랜드 운명이 올해들어 더욱 뚜렷하게 엇갈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늦지 않게 러시아 시장 철수를 선언한 일본과 끝까지 현지서 버텨보겠다는 한국, 러시아 진출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중국 등 '3국3색'의 대러시아 전략은 마치 천하패권을 두고 다툰 소설 '삼국지'의 쟁패(爭霸)를 연상케한다.

중국 자동차업체는 바야흐로 '물 만난 물고기'와 같은 모습이다. 중국승용차시장정보연석회(CPCA)에 따르면 올해 1, 2월 중국 자동차 수출 물량이 전년 동월 대비 40% 가까이 증가한 68만2000대에 달했다. 주목할 것은 러시아가 중국 자동차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올라섰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만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차량 운반 모습
중국의 하발 SUV/사진출처:하발 홈피 

중국은 1, 2월 두달동안 러시아에 지난해 수출 물량(16만2,150대)의 절반에 육박하는 7만9285대를 수출했다. 전년 동기 대비 무려 170% 성장이다. 그동안 러시아 자동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GM·폭스바겐·토요타·현대차 등 글로벌 '빅5', '빅10' 업체들이 판매를 중단하자 그 빈자리를 중국 자동차가 차지한 것이다. 

중국 자동차의 진격은 앞으로 더욱 요란할 것으로 보인다. 디이자동차(FAW) 프리미엄 브랜드 홍치(Hongqi)는 지난해 일찌감치 철수한 독일 벤츠 모스크바 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공장은 벤츠가 러시아 자동차 판매업체 아브토돔(Avtodom)에게 매각한 곳이다. 그 전에는 벤츠를 비롯한 BMW와 아우디 등 이른바 독일 빅3(BBA, 벤츠 BNW, 아우디)의 러시아내 생산 거점으로 활용됐다.

BBA가 철수 전 러시아 시장에서 연간 최대 20만대를 판매했으니, 대체 수요는 충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자동차 브랜드는 독일 BBA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일본 토요타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러시아 국영 자동차개발연구소 '나미'(NAMI)로 이전할 것으로 전해졌다.

토요타 자동차(위)와 토요타의 '나미' 이전 가능성을 언급한 만투로프 산업통상부 발언 관련 기사 묶음/젠(dzen.ru) 노보스티 캡처

국영 타스 통신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데니스 만투로프 러시아 부총리 겸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 16일 러시아 재계 이익단체인 '러시아 산업·기업인 연맹'(RSPP, 우리의 전경련 격) 회의의 부대행사에서 "토요타의 러시아 자산을 나미로 이전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토요타 대변인은 이 보도에 대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의 처리를 놓고 다양한 선택지를 검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아직 최종 결정이 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러시아 현지 분위기를 감안하면 토요타도 이미 철수한 일본 닛산의 뒤를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닛산은 지난해 10월 러시아 내 자회사의 주식을 'NAMI'에 단돈 1유로에 양도하고 손을 뗐다.

토요타는 NAMI로 넘길 수 있는 준비는 끝난 상태로 보인다. 지난해 9월 생산 재개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의 생산 종료를 발표한 뒤, 생산시설을 봉인(러시아 현지 표현으로는 '보존'·консервация)하고 두달 후(11월)에는 1만9,000명에 달하는 직원을 정리하는 구조조정 절차에 들어갔다. 2007년 말 가동에 들어간 이 공장은 라브4(RAV4)와 캄리(Camry) 등을 연 10만대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당국은 이미 "토요타 공장이 소유한 미사용 부지를 상트페테르부르크시로 이전해 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장 자체가 닛산과 마찬가지로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닛산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닛산은 지난해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등 러시아 자산을 'NAMI'에 단돈 1유로에 양도하고 손을 뗐다. 현지 매체 이즈베스티야에 따르면 닛산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서는 현지 자동차 회사 아프토바즈(Avtovaz)가 29일부터 라다(Lada) 승용차를 생산한다고 발표했다. 아프토바즈는 올해 40만대 이상을 생산하고, 내년 2사분기부터 새로운 모델을 출시할 계획이다. 아프토바즈의 닛산 공장 활용은 만투로프 장관이 지난해 12월 예고한 바 있다. 

현지 전문가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에서 서방 브랜드 자동차를 조립하던 현지 공장이 러시아와 중국 등 친러 국가들의 자동차 조립 라인으로 빠르게 교체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자동차 '포드'의 현지 공장은 시설 자체를 완전히 바꿔 러시아 브랜드의 주방가구가 생산된다. 

일본 자동차 브랜드의 현지 공장 정리가 끝나면, 다음 차례는 어쩔 수 없이 현대·기아차가 될 전망이다. 타스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산업통상부는 지난해 12월 가동을 중단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기업이 보존·консервация(우리 식으로는 봉인)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당국과 함께 생산 현장 활용을 위해 가능한 옵션에 대해 작업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 여기서 한 기업은 현대차 공장으로 추정된다. 

잘 알다시피 현대 자동차도 이미 토요타의 뒤를 이어 지난해 10월 현지 공장을 봉인하고, 인력 2천여명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의 드미트리 체르네이코 인구, 노동및 고용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3일 "현대차의 구조조정이 마무리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토요타와 같은 여건이 된 것이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매각 가능성까지 현지 담당 관료에 의해 나왔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현지 언론의 분위기는 우호적이라는 점이다. 로시스카야 가제타(RGRU)는 최근 현대차의 미래에 대해서는 의문표를 달면서도 전문가들을 인용,  "한국 자동차 브랜드는 유럽이나 다른 아시아(일본) 브랜드처럼 러시아 시장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현지 공장 주변에는 대규모 현대·기아차 부품 단지도 조성돼 있다. 

현대차가 마지막 순간까지 버틸 수 있는 숨통은 열려 있다. 러시아 산업부가 지난해 12월 병행수입이 가능한 자동차에 '비우호국 브랜드'도 포함시켰다. 현대차와 프리미엄 브랜드인 제네시스, 기아도 병행수입 가능 목록에 오른 것이다. '병행수입'은 상표권자가 직접, 혹은 허가를 내주지 않는 상태에서도 제품의 수입이 가능하도록 한 조치다. 현대차가 마음만 먹으면 주요 모델을 제 3자를 통해 러시아에 수출 가능한 것이다. 

현대차는 지난 2월 제네시스 플래그십 세단 모델 'G90'에 대해 러시아에서 형식 승인을 받았다. 병행수입에 '제네시스'까지 포함될 수 있다.

현대차 상트 공장(위)와 주주총회 모습/사진출처:현대차

그렇다고 해도 러시아에 대규모로 투자한 현대자동차의 고민이 깊어갈 수 밖에 없다. 장재훈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 23일 주총 인사말에서 "2022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지속, 코로나19 장기화, 반도체 포함 주요 부품의 공급 부족 등 어려운 경영 환경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한 해"라고 평가했다. "역대 최고 실적인 매출액 143조, 영업이익 9조8000억원라는 의미 있는 성과를 달성했다"라고 밝혔지만, 러시아 비즈니스는 완전히 고꾸라졌다. 

현대차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까지 러시아 수입 자동차 시장의 점유율 1위 업체였다. 하지만 지난해 현대차는 전년(2021년) 대비 66% 줄어든 5만4017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지난 2011년부터 가동을 시작한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의 출하대수는 지난해 4만4976대로 전년(23만3084대)에 비하면 80.7%나 줄었다.

올해 1월 판매량도 185대로 전쟁 발발 전인 전년 동기(2022년 1월) 대비 98% 감소했다. 월 1만 대 이상 팔았던 현대차가 이제는 200대도 팔지 못하는 위기에 빠진 것이다. 카자흐스탄 등 인근 국가로부터 병행수입이 활성화한다고 해도 수천대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 자동차 브랜드를 따라 쉽게 보따리를 쌀 수는 없다. 러시아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현대차는 전쟁이 끝나면 다시 러시아법인을 세워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더 많은 지출이 발생할 수 있다. 또 매각 여건도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러시아가 지난해 3월 비우호국을 지정하면서 한국도 그 범주에 넣었기 때문이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러시아에 진출한 비우호국 소속 기업은 현지 자산을 매각할 경우 △최소한 시장 가격의 50%를 할인해 주고(절반 가격 이하로 팔고) △할인율이 90%이상 10%, 90%이하 할인시는 5%를 세금 명목으로 러시아 정부에 내야 하는 것으로 27일 밝혀졌다. 당초에는 러시아 당국이 외국 기업 측에 자발적으로 기여금을 내든지, 매각 대금을 분할로 받든지, 둘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으나, 일률적으로 5~10% 강제 기부로 변경됐다고 한다.

이 기준에 따른다면 지난해 3분기 기준 2조4984억원에 이르는 자산을 매각할 경우, 최소한 1조3천억원의 허공으로 날아가는 셈이다. 또 독일의 폭스바겐은 러시아를 철수하면서 현지 업체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위탁생산 중이던 러시아 자동차업체 가즈가 폭스바겐이 계약을 위반했다는 것. 폭스바겐의 칼루가 공장이 압류를 당할 처지에 놓였다고 코메르산트가 지난 20일 보도했다.

러시아 국외영토 칼리닌그라드 아프토토르에서 차량을 위탁생산해온 현대차가 제 2의 폭스바겐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가 2천여개 외국 기업이 러시아 자산의 매각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보도했는데,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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