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만에 중대에서 겨우 한 소대가 살아남았다" - 가장 치열했던 '바흐무트 전투'의 기록
"몇 주만에 중대에서 겨우 한 소대가 살아남았다" - 가장 치열했던 '바흐무트 전투'의 기록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06.0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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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월을 훌쩍 넘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가장 피비린내나는 전장은 최근 러시아군에 함락된 도네츠크주(州) 바흐무트(러시아어로는 아르쵸모프스크 Артёмовск, 2016년 우크라이나가 바흐무트로 개명) 였다. 전투도 9개월 이상 계속됐다.

바흐무트 공략에 앞장선 러시아 용병단체 '바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은 지난 5월 20일 "바흐무트 (행정) 경계선 안에는 우크라이나 군인이 한명도 없다"며 완전 점령을 선언했으나, 우크라이나 측은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바흐무트의 함락은 이제 현실이 된 분위기. 그리고 바흐무트 전투에 참전했던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의 증언과 이를 인용하는 언론 보도도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스트라나ua의 6월 2일자 웹페이지. '몇 주만에 중대에서 겨우 소대급이 살아남았다'는 제목이 달려 있다/캡처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일 바흐무트 전투에 직접 참여했던 우크라이나 군인 6명의 생생한 목소리를 실었다. 대대장급 간부(중령)와 초급 장교(중위, 소대장), 하사관(중사, 분대장), 동원 예비역, 의무병 등 참전 용사 6인은 각자의 위치에서 경험한 바후무트 전투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 매체에 따르면 바흐무트에서 한달 넘게 지낸 유리(중사, 분대장급)는 "전우들의 시신이 절반은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 묻혀 있다"며 "정확한 피해 규모를 계산할 수는 없지만, 함께 있던 분대원 8명중 절반만 살아남았다"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
"우리의 임무는 반격이었다. 시가전을 대비했지만,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불타고 무너진 건물 안에서 싸워야 했다. 어둡고 찬바람이 몰아쳤다. 한 건물의 윗층에는 '바그너 전사'들이, 아래 층에는 우리가 주둔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싸움은 마치 새장 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비슷했다. 때로는 주먹으로, 때로는 칼을 들고 육박전을 벌였다. 건물에 설치된 지뢰로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다. 누가 언제 설치했는 지도 모르는 지뢰였다. 우리는 서로 큰 소리로 대화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항복하고 여기서 같이 먹고 마시자"고 했다.

바흐무트 유명 건물의 폭격 전후 모습/사진출처:스트라나.ua

최악의 상황은 그들(러시아)이 '에어 폭탄'(전투기에서 투하하는 일종의 공대지 유도 미사일 UPAB-1500VE(러시아 표기로는 УПАБ-1500Б-Э). 일정 거리를 날아간다고 해서 '활공 폭탄'이라고도 한다/편집자)을 사용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에어 폭탄'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건물도 '에어 폭탄'에 종이처럼 구겨졌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바흐무트에서 전사한 시신들의 절반은 잔해 아래에 남아 있다. 아무도 피해 규모를 정확히 모른다. 분대원 8명 중 절반이 살아 남았을 뿐이다." 

러시아군의 '에어 폭탄' 우빠브(УПАБ-1500Б-Э)/사진출처:위키피디아
러시아군의 '에어 폭탄'이 떨어진 곳의 모습/영상캡처

세르게이(중위, 소대장급)는 "바흐무트는 한마디로 지옥이었다"며 "한 중대에서 한 개 소대도 살아남지 못했고, 소대원 3분의 2가 쓰러졌을 때 후퇴 명령을 받았다"고 마했다.

다음은 그의 증언 요약이다. 
"바흐무트는 우리 부대의 마지막 전장이었다. 몇 주간 전투 끝에 한 개 소대도 살아남지 않았다. 지옥이었다. 바흐무트로의 부대 배치는 마치 자원한 것처럼 진행됐다. 지난 1월 대대가 편성된 뒤 바흐무트 파견 중대에 지원자를 받겠다고 했다. 하지만 가고 싶어하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겨우 10여명이 살아나왔다. (대대) 지휘부는 무작위로 바흐무트 파견 중대원을 뽑았고, 별다른 준비 과정도 없었다. 병사들은 무기와 비상식량 등을 받고 차량에 올랐다. 마치 집시들이 거주지를 이동하듯 바흐무트로 갔다.

바흐무트에서는 기존의 우크라이나군 여단에 배속됐고, 중대는 4개 소대로 쪼개져 서로 다른 방향의 방어 위치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도로는 이미 적의 사정권 안에 들어 있었다. 지정된 방어 위치에 도착하기도 전에 희생자가 발생했다. 우리는(소대) 물이 반쯤 들어찬 민간 시설의 지하실에 자리를 잡았다. 적의 공격은 24시간 계속됐다. 끊임없이 위치를 바꿔야 했다. 일주일간 그 곳에 머물면서 잠은 겨우 몇 시간 잘 수 있었다. 불과 사흘 만에 절반이 부상했고, 3분의 1이 살아 남았을 때 철수 명령을 받았다. 철수 후에 확인하니 멀쩡한 병사는 중대원 70명 중 23명뿐이었다." 

바흐무트 주둔 우크라이나군 병사가 독일 TV 채널 도이체벨레 인터뷰중 눈물을 닦는 모습/캡처

지난 2월 바흐무트 전선에 투입된 스타니슬라프(나이가 든 동원 예비역)은 2주간 전투를 벌이면서 다리 부상을 입었다. 그는 "매 순간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며 "영화로 전쟁을 보는 것과 직접 현장에서 느끼는 공포는 차원이 다르다"고 증언했다.

그의 발언 요약.
"지난 2월 바흐무트로 가 2주간 싸웠다. 파편에 다리 부상을 입었다. 평지 전투에서 깨달은 것은 '참호가 깊을수록 살아남을 기회가 더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바흐무트로 투입된지 이틀만에 물과 식량이 떨어졌다. 장교급 지휘관들은 대부분 후방에서 무선으로 명령을 하달했고, 현장 지휘는 중사(분대장)가 맡았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정보가 전혀 없었다. 건물에 접근할 때 그 곳에 아군이 있는지, 적이 있는지 몰랐다. 상황은 매시간 바뀌었다. 한 순간이라도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둘째 날, 바로 옆 전우가 폭격을 받아 다리와 팔을 다쳤다. 후송할 시간이 없으니 지혈대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30분 만에 숨졌다. 정신적으로 큰 중격을 받았다. 후방에서 전투 영화는 보는 것과, 허리 깊이로 물이 들어찬 참호에서 고통스린 비명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투입 첫날부터 젊은 친구들(징집병/편집자)은 혼이 빠졌다. 그들은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온갖 핑계를 만들었다. 아프다거나 다리와 발이 삐었다고 하고 정신적 장애를 호소했지만, 모두 그 자리로 되돌아왔다." 

부상병을 들쳐매고 후퇴하는 우크라이나군/영상 캡처 

바흐무트에서 한달 가량 주둔하면서 '화력 지원'(포병/편집자)을 맡은 콘스탄틴 중위는 "지난 2월, 3월부터 우크라이나군에는 이미 방어의 작전 개념이 없었다"며 "혼성 부대는 서로 작전을 조율하거나 정확도 정보 교환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현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이러 이러한 목표물을 공격하고 3시간 안에 결과를 보고하라'는 상부의 명령은 터무니 없었다"며 "그 명령을 이행한 결과, 우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지적했다. 

의무병 세르게이는 두달 동안 300명의 부상자를 후송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차량 두 대가 부서지고 동료 세 명이 부상했다. 그는 "부상병 300명을 후송하기 위해서는 며칠간 잠은 커녕, 바닥의 피를 씻어낼 시간도 없었다"며 "적의 포격으로 '죽음의 길'이 된 대피로를 따라 부상병을 데리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군용 의약품 보급에 큰 문제가 있었고, 응급처치가 가능한 구급요원(의무병)들이 부족하고, 일반 병사들은 응급 처치의 기본도 몰랐다"고 털어놨다. 또 "비상 의약품들이 부족해 살릴 수 있었던 많은 부상병들이 제 3선 야전병원에도 죽어갔다"고 밝혔다. 

대대장 급인 보그단 중령은 '바흐무트의 결사항전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가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바흐무트 방어작전이 길어지면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자책했다. 또 "몇 달 전에 해도 별다른 병력 손실없이 바흐무트를 철수할 수 있었는데, 왜 최근까지 바흐무트 방어를 고집했는지 그 답을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의 시가전 모습/사진출처:우크라군 합참 페북

일반 병사들과는 또 결이 다른 그의 증언을 요약한다.
"지난 가을부터 시작된 바흐무트의 방어는 여러모로 매우 중요했다. 도네츠크 전선이 확대되면서 적은 여러 방향에서 한 번에 (바흐무트를) 공격할 것으로 예상됐다. 실제로 적은 엄청난 군사력을 투입했다. 우리가 바흐무트를 방어하는 사이, 우크라이나군은 재편성되고, (징집병으로) 새로운 군대를 만들고, 정비하고, 훈련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바흐무트는 적에게는 일종의 '덫'이었다. 바흐무트에 집중하면서 다른 전선은 힘이 약해졌다. 그 곳에서 우크라이나군은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바흐무트의 방어 작전이 너무 길어지면서 많은 피를 흘 렸다고 생각한다. 몇 달 전에는 방어 전력에 손실을 보지 않고 바흐무트를 철수할 수 있었다. 철수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왜 우리가 최근까지 바흐무트 외곽 방어를 계속했는지 그 이유에 대한 답을 나는 찾을 수가 없다."

미국 측에 따르면, 바흐무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손실은 십만명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크다고 스트라나.ua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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