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 구제금융안이 몰고온 국제정치적, 금융시장의 후폭풍은..
키프로스 구제금융안이 몰고온 국제정치적, 금융시장의 후폭풍은..
  • 이진희
  • jinhlee@hk.co.kr
  • 승인 2013.03.28 0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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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구제금융안을 밀어붙인 독일과, 그 금융안으로 큰 피해를 본 러시아의 관계가 심상찮다. 키프로스 구제금융 후폭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금융분야가 아니라 정치 외교적 관계다.

유로존의 키프로스 구제금융안은 독일의 주도로, 키프로스에 구제금융 100억유로(14조원)를 제공하는 대가로 10만유로(1억4000만원) 이상 은행 예금계좌에 최대 40%의 분담금을 부과하기로 합의했다. 이 고액 계좌 주인의 절반 가까이는 러시아 사람이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독일에 대한 반감이 비등한한 상황이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지난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KAS)' 사무실을 러시아 검찰이 급습했다. 같은 날 모스크바에 있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FES)' 사무실엔 러시아 국세청과 검찰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아데나워 재단은 독일의 비영리단체(NGO)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소속된 기독민주당(CDU)의 싱크탱크(연구기관) 역할을 하는 곳이고, 에베르트 재단은제1야당인 사회민주당(SPD)의 싱크탱크다다.

러시아 검찰은 법원 영장도 없이 들어닥쳐 몇 시간 동안 사무실을 뒤지며 각종 서류를 요구했고, 컴퓨터를 압수해갔다.

사건 직후 독일 주간지 슈피겔 온라인판은 러시아 당국이 독일 NGO를 키프로스 구제금융안 타결 이후 보복 타깃으로 삼았다고 보도했다. 귀도 베스터벨레 독일 외무장관은 즉각 베를린 주재 러시아 대사를 소환해 강력히 항의했다.

독일 NGO에 대한 러시아측 대응은, 당연히 러시아측의 보복 행위로 보인다. 유럽의 어떤 나라들보다 독일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러시아로서는 키프로스 구제금융안으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배신감에 떨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겉으로는 지난해 5월 푸틴 대통령 취임 후 해외에서 자금 지원을 받는 NGO에 대해 벌이는 집중 조사의 일환이라고 우기는 모습이다. 러시아 당국은 NGO들이 서방국가의 스파이 역할을 한다며 활동가들에게 '해외 요원'으로 신고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동안 국제앰네스티와 메모리얼 등 인권단체들이 주로 조사 대상이었으나 독일 NGO가 급습을 당하니,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러-독일 관계를 우려하고 있다.

유럽 금융시장도 키프로스 구제금융 이후 후폭풍에 시달리는 모습이다. 로이터통신 등은 “러시아 검은돈 주인들이 요즘 키프로스뿐 아니라 서유럽, 특히 이탈리아·스페인 은행에서도 돈을 빼내려 한다”고 26일 전했다. 키프로스 사태 이후 유로존 시중은행에서 일고 있는 예금 이탈 움직임의 주인공들인 셈이다. 유로존 금융기관들은 자칫 후폭풍에 시달릴까 전정긍긍할 수 밖에 없다. 미국 검은돈 감시단체인 글로벌금융투명성(GFI)은 2011년 한 해에만 러시아 자금 2000억 달러(약 220조원) 정도가 키프로스를 거쳐 이동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만큼 러시아계 자금(검은 돈)이 유로존 금융기관을 떠돈다는 뜻이다.

다급해진 유로존측은 “키프로스 손실 분담(Haircut)은 예외적 조치”라며 “다른 나라 은행들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다. 러시아계 돈 주인들은 마피아나 기업인만이 아니어스 안전한 곳을 찾는 시도는 계속될 전망이다.

외신에 따르면 최근의 유럽 상황은 냉전으로 미국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가 임박했던 1949년과 비슷한 분위기라고 한다.

당시 구 소련 재무부 관리들이 ‘크렘린 자금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 프랑스 BCEN등 서유럽 은행들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소련이 해외에 묻어둔 달러 자금뿐만 아니라 석유 등 천연자원 수출대금 중 일부를 맡기겠다고 제안했다. 미국의 소련 자산동결 등 제재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소련이 서유럽 은행에 피난시킨 자금은 40억~60억 달러였다. 이 자금들이 계기가 돼 유로달러 시장이 태동했다는 게 금융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2차대전 직후라 소련 자금은 미국 밖에 있는 달러자금의 거대한 저수지였고, 이를 운용하게 된 유럽은 나중에 미국 월가와 자웅을 겨루는 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키프로스를 떠나 안전한 곳을 찾아 움직이는 러시아 검은돈은 얼마나 될까. GFI가 올 1월에 내놓은 보고서에서 러시아 검은돈이 1994~2011년 17년 동안 연 평균 435억 달러씩 해외에 저장된 것으로 추정했다. 모두 합하면 그 규모가 무려 7825억 달러(약 861조원)에 이른다. 이 돈의 원천은 역시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46%에 이르는 지하경제다. 지난해 러시아 GDP가 1조9500억 달러였으니 지하경제는 8970억 달러에 이른다는 얘기다.

외신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가들은 “막대한 러시아 검은돈이 키프로스를 떠나 움직이면 60년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자금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두바이·아부다비·바레인 등 중동의 주요 은행들이 러시아 기업과 부호들에게 접근하고 있는데, 이 돈이 기존의 중동 오일머니와 합쳐지면 제3의 거대한 자금시장이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키프로스 구제금융안이 유럽과 러시아 관계는 물론, 세계 금융시장에 큰 파장을 던진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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