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크렘린에 가면
모스크바 크렘린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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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5.3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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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하면 역시 크렘린이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을 이전에 크렘린이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누구나 크렘린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어 그런 별칭은 사라져야 할 것 같다. 물론 대통령 집무실 등 일부는 여전히 출입금지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다. 청와대를 보는 것보다는 더 개방적으로 활짝 열려 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렘린은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과 맞선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다. 레닌 스탈린 후르시쵸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쵸프와 같은 공산주의 수뇌들이 세계를 움직인 심장이었다.

영어식 표기인 크렘린은 러시아어로는 `끄레믈리'라고 한다. 성채라는 뜻이다. 그래서 `끄레믈리'는 모스크바 뿐 아니라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 흔히 있다. 2,235미터 길이의 5각형 성벽에 20개의 망루를 가졌다.

이 크렘린의 역사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세기 이반 3세 때 오늘의 형태를 가진 성벽으로 모양을 갖추었지만 애초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1147년 유리 돌 고리키가 모스크바를 창건하면서였다.

당시 현 모스크바 동북방의 수즈달 공국을 다스리던 돌 고리키는 변방의 주요 마을들을 요새화하면서 모스크바를 건설하였는데 그는 1156년 모스크바 강 변의 볼로바츠키 언덕위에 목조 성채를 쌓으면서 이를 중심으로 모스크바를 창건하였다.

9세기 말 동 슬라브 민족이 키예프를 중심으로 일으킨 러시아는 12세기 중엽 수즈달과 모스크바로 통치의 축이 옮겨지면서 13세기 초 몽골의 침략을 받게 된다.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를 정벌하고 그의 손자 바투는 1239년 까지 수즈달 모스크바 키예프를 유린하였으며 이어 폴란드 항가리 체코까지 공략했다.

몽골이 모스크바에 들어갔을 때 크렘린은 오늘날 크기의 1/10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 가옥과 창고 마굿간 정도가 있는 작은 성채에 불과했다. 전열을 정비한 몽골군은 볼가 강 하류에 킵차크 한국을 세우고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230여년 간 러시아를 지배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모스크바도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으나 모스크바 강의 수로를 이용해 점차 상업도시로 변모하면서 크렘린도 역사적 황금기를 거쳐 몰락과 부활의 길을 걸어 왔다.

15세기에는 성벽과 교회들이 들어서면서 면모를 일신했다. 크렘린 궁 안에는 여러 개의 러시아 정교 사원이 있다. 제정러시아의 대표사원으로 역대 황제들의 대관식이 열렸든 우스펜스키 사원(1479), 황제 가족들의 개인 예배를 위해 지은 블라고베쉔스키 사원(1489), 그리고 이반 대제 등 48개의 귀족들 관이 안치된 아르항겔스크 사원(1508) 등은 이반대제의 종루(1508)와 함께 크렘린 궁의 명물로 이들은 모두 이 때 지어졌다.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서면서 171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하였지만 전통적으로 황제의 대관식은 이곳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 열렸다. 1894년 10월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화려하게 거행된 로마노프 왕조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때는 고종황제가 보낸 이범진이 특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범진은 1905년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에서 패하자 러시아로 망명했으나 1910년 한일 합방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1990년 한소 수교와 함께 행방을 몰랐던 그의 묘를 찾아냈고, 우리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 크렘린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1812년에는 나폴레옹이 크렘린에 입성하기도 했다. 그후 모스크바 대화재로 소실된 크렘린은 추후 개축됐다.

근대사회에서 제정러시아 시대나 소련시절 크렘린은 변함없이 정치의 중심지였다. 역대 황제의 처소였던 크렘린 대궁전은 1934년 3천명을 수용하는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장으로 개축되기도 했다.

모스크바 공국과 로마노프 왕조의 흔적은, 역대 짜르(황제)들의 유품들과 전리품들을 모아 전시한 크렘린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광객들에게는 무기고라고 알려진 이 박물관은 원래 이 건물의 이래 층이 무기고로 쓰였기 때문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사치함은 물론이고, 제정러시아가 왜 20세기 초에 민중혁명으로 명운을 다하게 됐는지, 일깨워 주는 곳이다.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이후 레닌과 스탈린, 소련공산당의 역대 서기장들, 옐친, 푸틴 대통령 등 최고권력자들은 레닌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붉은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원로원(내각관)에 기거하며 집무하고 있다. 이 건물의 둥근 지붕 위에는 대형 러시아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크렘린 궁 안에는 주변 건축과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건물 하나가 있는데, 바로 6천석의 자리를 가진 대 회의장이다. 1961년에 완성된 이 건물 안에서 냉전의 절정기에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개방 이후 발레, 오페라 등 공연이 열리는 대형 공연장으로 쓰인다.

원로원 건물의 성벽 밖의 붉은 광장에는 붉은 대리석으로 된 레닌 묘가 있고, 그 뒤편 성벽을 따라 스탈린과 역대 공산당 권력자, 고리키와 키로프 등 사상가, 그리고 예술인 과학자 우주인들의 유골이 묻혀 있다.

크렘린 궁 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건물은, 전통 러시아 금색 양파모양 돔들을 이고 있는 그라노비타야 궁이다. 황제들이 외교 사절을 맞거나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던 곳인데, 지금도 외국 대사들이 신임장을 제정하는 현대 외교의 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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