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루데인 화재사건, 데스베 익사사건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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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7.0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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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의 소설집 ‘빙화(氷花)’에는 춥고 매서운 바람 속에 위태롭게 피어 있는 물꽃의 슬픈 이미지가 빛나고 있다.

1990년대 전반, 두 차례에 걸쳐 모스크바에서 4년 동안 유학생활을 했던 작가는 그 황량하고 이질감 넘치는 공간을 위태롭게 흔들리는 인간 운명을 드러내는 작품배경으로 활용하고 있다. 1988년 등단 이후 두 번째 창작집으로, 8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이 중 4편이 구 소련 붕괴 후 혼돈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표제작 ‘빙화’는 만남과 이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삶의 초상이다. 모스크바 유학으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 한국 여성이 기숙사 화재로 엘리베이터에 갇혀 사망한다. 한국에서 전화로 그 소식을 전해들은 주인공은 모스크바에서 함께 어울렸던 그녀를 추억하며 마음의 이별 의식을 치른다. 이국에서 인생의 반전(反轉)을 모색하던 그녀는 혹독한 현실과 뜨겁고 푸른 열정을 동시에 품고 있는 ‘얼음꽃’이었다. 푸른 빛깔로 피어올랐다가 지고 마는 얼음꽃! 소멸(죽음)의 순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그늘에 발을 들이민 순간 비로소 삶의 정체를 알아차렸을까. 인생이야말로 반드시 한 번은, 언제까지나 제 것일 줄 알았던 빛나는 미래와 창창한 계획, 가슴 설레는 희망 (중략)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깨끗이 접어야 한다는 사실에 원망스러워하진 않았을까.’(67쪽)

단편 ‘봉인’에도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깔려 있다. 환갑을 바라보는 중늙은이가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러 모스크바 유학길에 나섰다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작가에게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 띠처럼 맞물려 있다.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는 법이다. 하지만 그 삶의 비밀을 밝혀줄 수 있는 죽음은 봉인돼 있다. 그 밀봉을 뜯기 전까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아닐까.

작가는 “20대 때, 처음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죽음을 제1화두로 삼았다”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했다. 이 고민은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했다.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은 하나같이 소외되고 외롭고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푸른 등불의 요코하마’는 레즈비언의 고통과 슬픔을 들여다본 작품이다. 동성애를 용납할 수 없는 악으로 규정한 후 이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도덕과 법의 체제를 세운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성이 은연중 드러난다.

하지만 작가는 소수자를 배제시키는 현실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그것과 맞서는 대신, 그들의 아픈 가슴을 따뜻하게 껴안아 위안을 준다. 슬픔을 응시하고 견디는 작가의 시선은 치밀하고 빈틈없이 짜인 문체와 짝을 이룬다.

‘오랜 세월 견뎌오면서 서로 겯거니 틀거니 버드러지다 못해 급기야 비명을 지르는 것이리라.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 부서지고 망가지고 삭아서 잦아들며 내지르는 소리 같다. 그녀의 내면을 억압했던 납덩이처럼 묵직하고 기포처럼 가벼워 충족되지 못했던 소망들이 한꺼번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 같기도 하다.’(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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