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유학파 연출가 전훈의 전성시대?
러 유학파 연출가 전훈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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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0.0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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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이 연출한 연극 ‘갈매기’(안톤 체호프 작)는 유머러스했다. 그는 ‘갈매기’를 통해 체호프의 작품이 왜 코미디인지를 간결하면서도 생동감있게 증명했다.

지난 1일 오후 8시 서울 정동극장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안톤 체호프 서거 100주년을 기념한 4대 장막전 가운데 연극 '갈매기'(연출 전훈)가 올라갔다. 객석은 이미 매진이었다. 계단에 놓는 보조석 마저 다 팔렸다. 극장 입구에는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도 보였다.

극장은 꽉 찼다. 통로에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데 객석 가운데 빈 자리가 딱 하나 있었다. 앞에서 여섯 번째, 정중앙의 B77번. '명당 자리'였다. 의자에는 얼굴이 담긴 사진 액자와 티켓 봉투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다름 아닌 체호프였다. 봉투에는 검정 사인펜으로 '안톤 체호프'라고 적혀 있었다. 연출가 전훈은 "체호프에게 바치는 공연이다. 그래서 그를 객석에 모셨다"고 말했다. 공연을 보러 온 최태지 정동극장장의 좌석은 오히려 계단 옆쪽이었다.

'체호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막이 올랐다. 놀라웠다. 연극 '갈매기'가 유쾌했다. 국내에서 체호프 작품들은 '건조하고 따분한 연극'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런데 객석에선 시종일관 웃음이 터졌다. 그렇다고 일부러 대사를 비튼 것도 아니었다.

이유가 뭘까. 러시아 유학파인 연출가는 체호프의 시선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진지함과 소소함, 기쁨과 슬픔, 희극과 비극, 갈망과 외면이 수시로 교차하는 삶의 풍경을 말이다. 한 치의 오차 없이 그 교차점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래서 무심하게 터지는 객석의 웃음에도 "삶은 코미디"라는 체호프의 가슴 시린 통찰력이 선명하게 묻어났다.

번역의 강도 성공적으로 건넜다. 대사는 귀에 쏙쏙 들어왔고,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그 간결함 속으로 체호프의 숨소리가 바람처럼 무대를 훑고 지나갔다. 배우들의 연기도, 그들이 내뱉는 대사도 살아서 꿈틀댔다. "인생이 뭐냐고 묻지 말아다오 / 그냥 지나치는 바람이라면 / 물어도 물어도 대답 없을 테니/내 인생이 뭐냐 묻지 말아다오."

4막에서 다소 고꾸라진 극적 긴장감은 아쉬웠다. 그래도 전훈의 '갈매기'는 박제가 아니었다. 그는 체호프를 산 채로 무대에 불러낸 '주술사'였다. 31일까지 정동극장, 2만~5만원, 02-75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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