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를 우리땅으로 만드려는 꿈 큰 사나이
연해주를 우리땅으로 만드려는 꿈 큰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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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9.20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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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컴에는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로 알려진 것이었소. 러시아 연해주땅 85만ha을 50년간 임차하는 거요. 한국 농지의 절반 규모요. 여기에 북한 인력을 동원해 농사짓는 거대한 구상이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여기에 관심이 많았소. 1996년 어느 날 그의 동생 전경환씨로부터 사업비 63억원이 마련됐다는 연락이 왔소. 쌍용빌딩의 사과박스에 현찰로 보관됐다가 그만 불법비자금으로 검찰에 압류된 게 그것이오. 전통(全統)의 꿈은 이로 인해 무산됐소.”

삶은 참으로 여러 갈래라, 간혹 10여년간 사귀어도 실체가 모호한 인물이 있다. 이병화(59)씨는 국제농업개발원의 원장이다.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안에 있는 사무실에서 그는 돋보기 안경을 낀 채 ‘월간 상업농경영’ ‘계간 기계화농업’ 등 농업전문잡지를 만들고 있다. 그런 그가 입을 벌렸다 하면 질박한 사투리로 사람을 홀리게 한다.

“바로 그해 8월 권영해 안기부장이 나를 불러 연해주사업을 극비로 추진하겠다고 했소. 사업 암호명은 ‘발해복권(復權)’이었지. 그런데 두 달 뒤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근무하던 안기부 직원이 북한요원에게 피살되자 흐지부지됐어. 김대중 정권 시절 연해주에서 농사지은 벼를 ‘대통령 특별기금’으로 수매해줬소. 열차로 지금껏 6000여t의 곡물을 북한에 실어날랐지. 현 정권 들어와 수송이 중단됐소.”

스케일과 등장인물이 너무 광대하고 기상천외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1989년 이후 러시아 극동지역 농업경제자문위원의 자격으로 121차례나 러시아를 안방처럼 들락거린 입출국기록이다. 품위를 유지할 나이도 됐지만, 여전히 ‘깍두기’형 머리인 그는 두꺼운 허리 위로 청바지를 올려입고 있었다.

그를 만난 곳은 경부고속도로 기흥인터체인지를 벗어나자마자 나오는 3000여평의 농장. 그는 “1971년 박통(朴正熙)이 박진환(朴振煥) 경제특보에게 시켜 800만원으로 만든 개인농장”이라며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스프링클러가 설치된 곳”이라고 설명했다. 농장에는 마치 관공서처럼 빛바랜 태극기가 게양돼있다.

“박통은 주말에 관악골프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가끔 이곳을 방문했소. 그때마다 박통의 지시를 받고, 대통령을 만난다는 사실을 숨긴 채 새마을지도자들을 불러 모았어. 박통은 정부 통계보다 진솔한 민성(民聲)을 직접 들으려 했소.”

농장에는 주택 3채가 딸려있는데, 이 중 안쪽 주택은 박통이 직접 설계한 새마을주택 1호다. 응접세트와 구형 다이얼전화기 등은 30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금 사용되고 있다.

“박통이 나를 이곳 별정직 농장장으로 발령냈소. 자격으로 치면 태권도·합기도를 하고 운전할 줄도 알지, 일본어를 읽을 줄 알지, 농사지을 줄도 알지요. 그보다는 이 녀석이 무식하게 생겨도 사람은 ‘진국’으로 판단한 거라. 여하튼 그 뒤로 우리 부부가 여기서 쭉 살았소.”

박통과의 인연은 그가 김해농고를 자퇴하고 농사를 돕던 시절인, 1961년 5월 16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날 경남 김해에서 토마토 농사를 짓던 그의 부친이 불법개조한 군용 트럭으로 납품하러 가다가 혁명군에 붙들려 옥고를 치렀다. 그는 울분을 못 이겨 박정희 국가재건회의의장 앞으로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지 못할 망정 생사람 잡는 엉터리 혁명하지 말라’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 뒤 도청으로 출두요구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장교는 대담한 배짱의 어린 그에게 호감을 느껴 오히려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고, 그는 “대학 진학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답했다. 그는 그해 검정고시에도 떨어졌지만, 그 장교의 배려로 이듬해 건국대에 영농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학위 없는 청강생이었소. 3년쯤 대학 다니다가 군대에 갔고, 그 뒤로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지었소. 당시 김해는 전국에서 처음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었을 만큼 선진농가가 많았지. 나는 그때 당근, 우엉, 샐러리를 일본에 수출하고 동네에서 유일하게 삼륜차를 몰았소. 군복을 물들여입고 워커를 신은 내 모습이 박통에게는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지. 또 자신에게 항의편지를 쓴 사실도 알았을 테고, 그래서 내가 농장장이 됐소.”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는 “여기 산추리꽃은 러시아에서 들여와 육종(育種)개량을 내가 한 거요. 꽃피는 봄에 숱한 사진가들이 여기로 모여드는 광경을 보면, 그동안 나를 무식하게만 보던 최형도 꼼짝없이 나를 ‘박사’라고 부르게 될 걸”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 러시아에서 박사학위 2개를 받았고, 농어민후계자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한다.

이 나이 잊은 사내는 또 무슨 커다란 것을 도모해, 상식적인 기자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것인지. 남을 즐겁게 해주는 이야말로 축복받을 것이다.

최보식기자 congchi@chosun.com

펀글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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