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이 걸어가는 슬픈 독재자의 길=김철웅
푸틴이 걸어가는 슬픈 독재자의 길=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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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9.20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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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전 경향신문 모스크바 특파원이 쓴 러시아 읽기 입니다.

칼럼 제목 독재의 상흔

쓴이 김철웅 경향신문 미디어부장

1993년 모스크바에서 연수 중이던 필자가 러시아 대학생들과 자주 벌인 논쟁은 ‘러시아의 선택’에 관한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민주와 독재 가운데 러시아가 어떤 체제로 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소련 붕괴 직후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의 총체적 혼란 속에서 어찌보면 해답이 뻔한 이 질문이 젊은 러시아 대학생들에게는 진지한 고민의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혹독한 군사독재를 체험한 나라에서 온 필자로서는 당연히 러시아는 현재의 혼돈을 감수하고라도 민주 시민사회의 길로 가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잘 먹혀들지 않았다. 학생들은 대부분 국가의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 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들이 누려보지 못한 민주 시민사회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이른바 ‘레알노스치(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들이었다. 항시 ‘소수의견’으로 몰리곤 했던 나를 향해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당신은 러시아(의 현실)를 잘 모른다”란 것이었다.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 러시아의 현실은 다시 한번 이런 질문을 던진다. 국가형성 초기 단계에서 안정과 민주주의는 양립불가능인가, 대중들은 빵과 질서의 대가로 독재를 어느 선까지 수용할 수 있는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독재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 같다. 북오세티야공화국 학교 인질사건 등 최근 일련의 테러사건들을 계기로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꾀하면서 그 조짐이 완연하다. 지난주 그는 주지사를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고 국가두마(하원) 선출방식을 완전히 비례대표제로 바꾸는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명분은 테러리즘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연방국가인 러시아에서 89개의 공화국·주정부 수장들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고 친크렘린계 의원 수를 크게 늘릴 수 있도록 선거방식을 바꾼다는 구상에 대한 필자의 느낌은 “올 것이 왔다”였다. 테러는 좋은 구실일 뿐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의 이 ‘회색 추기경’에게 가장 어울리는 통치방식은 어디까지나 권위주의요, 독재일 것이다.

푸틴에게 권좌를 물려준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도 민주주의의 후퇴를 경고하고 나섰다. 그는 “자유의 속박, 민주적 권리의 후퇴는 단지 테러리스트들의 승리를 의미할 뿐”이라며 “민주국가만이 테러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이에 비하면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략한 부시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민주주의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것은 코미디 같다. 우경화한 패권국가의 이중잣대, 일방주의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러시아인들에게는 안정·질서를 대가로 한 독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다. 이 때문에 옐친 시절의 무질서에 환멸을 느낀 민초들은 푸틴이 가져온 ‘빠랴독(질서)’과 약간의 경제적 호전에 안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러시아는 70여년의 소련 공산당 독재와 저 혹독했던 스탈린 공포정치를 겪었다. 푸틴이 본격적으로 독재의 길로 간다면 그것은 과거로의 후퇴이지만 역설적으로는 전통으로의 회귀이다. 역사는 그래서 엄숙한 것이다. 스탈린 독재의 상흔은 너무나 깊은 것이어서 지금도 러시아인들의 정신 속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민중들의 독재에 대한 숙명적 용인과 베슬란 인질사건에서 확실히 보여주었듯 권력자의 국민생명 경시가 바로 그것이다.

긴 독재의 터널을 빠져나온 한국이 민주화의 대가로 겪고 있는 혼란을 보라. 약간의 좌향좌조차 곧바로 친북 반미 빨갱이로 규정해버리는 단세포적 사고구조, 국가보안법을 신주처럼 떠받드는 믿음 역시 반공을 국시로 했던 극우독재의 슬픈 상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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